■안기부 '900억대 비자금조성'파문문민정부 시절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국가예산으로 비자금을 조성, 선거자금으로 지원한 사실이 2일 검찰 수사에서 확인됨에 따라 새해 벽두부터 또다시 정국에 핵폭풍이 일 전망이다.
검찰은 이미 이번 사건을 북풍(北風)공작, 총풍(銃風) 세풍(稅風) 사건에 버금가는 국기(國基)문란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는 분위기다.
검찰이 경부고속철도 차량(TGV) 로비자금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안기부의 비자금 계좌를 포착했으면서도 이번 사안과 고속철 로비사건 수사를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검찰 관계자는 "안기부가 선거에 개입한 행위도 문제지만 국민의 혈세를 집권당의 선거자금으로 지원한 행위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라며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겠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지난해 5월 고속철 로비 자금이 흘러든 황명수(黃明秀ㆍ현 민주당 고문) 전 의원의 주변 계좌를 거슬러 올라가다 거액의 뭉칫돈을 발견한 뒤 8개월여동안 관련 연결계좌 수백개를 추적, 안기부가 불법 조성한 자금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과거 안기부가 노골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안기부 예산에서 일정부분을 '통치자금'으로 전용했던 일은 공공연한 관행이었지만, 안기부의 선거자금 지원 행태가 실제로 드러난 적은 처음이어서 충격파는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안기부가 500억원을 선거자금으로 지원하는 과정에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이 개입됐는지 여부는 아직 밝혀내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900억원대라는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총선자금으로 지원하는 일이 권영해(權寧海) 당시 안기부장 등 몇몇 안기부 고위관계자의 결정만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을 포함한 당시 신한국당 핵심 지도부에 대한 소환 조사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경우 현 정권과 YS정권간에 대선자금을 둘러싸고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갈등이 표면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직 사용처가 드러나지 않은 400억원대 비자금의 행방도 예측하기 힘든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검찰은 "나머지 400억원대의 행방도 추적중이나 시일이 좀 더 필요하다"며 "당시 총선에서 쓰고 남은 돈의 규모와 용처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만약 이 돈이 총선자금으로 쓰이지 않았다면 다른 불법적인 용도로 사용됐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검찰은 고속철 로비 사건 수사의 경우 잠적한 로비스트인 최만석(59ㆍ수배)씨가 황 전의원 등 2명에게 돈을 전달한 사실은 확인됐으나 최씨의 로비 활동이 거의 없었던 점으로 미뤄 일종의 사기극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진동기자
jaydlee@hk.co.kr
■900억 어떤 돈인가
안기부가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여당에 선거자금으로 지원한 500억원을 포함한 비자금 900억원은 어떻게 조성된, 어떤 성격의 자금일까.
극도의 보안을 유지하며 이 자금의 실체를 추적해 온 검찰은 "이 돈은 안기부 예산"이라고 밝혔다. 과거 군사정권처럼 재벌 기업들로부터 거둬들인 자금이 아니라 국회 심의를 거쳐 안기부에 정식 배당된 국가예산, 즉 '국민의 세금'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동안 안기부 예산에 대한 허술한 관리 감독체계, 이를 이용한 안기부의 정치 개입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만 제도적 차원의 시정책은 나오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예에서 보듯 집권층으로서는 언제나 감시ㆍ감독에서 자유로운 '눈먼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900억원의 자금 출처 및 조성 방법과 관련, 검찰 주변에서는 안기부가 각 정부 부처에 예비비 등의 명목으로 은닉해 놓았던 자금을 통해 주로 조성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또 안기부에 공식 배정된 예산을 '정책집행비''여론조사비'등의 명목으로 전용해 만든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와 관련, 전 안기부 감사관실 직원은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96년 3, 4월 '정책사업비' 명목으로 409억원이 지출되는 등 전체 안기부 예산중 1,062억원이 정치자금으로 전용된 의혹이 있다"고 폭로했었다.
안기부는 97년 2월 1996년 세출 예산 5,596억여원중 14억여원이 남았다고 재경부에 통보했지만, 나머지 돈이 어떻게 집행됐는지에 대해서는 검증된 적이 없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 시절 안기부의 예산과 인사를 총괄했던 곳은 기조실. YS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의 측근이었던 김기섭(金己燮)씨가 장기간 기조실장으로 재직하며 줄곧 안기부 예산을 다뤘다.
결국 검찰의 계좌추적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 900억원의 조성에는 김현철씨, 권영해(權寧海)안기부장, 김기섭 기조실장 등 핵심 '3인방'이 적극 개입했을 것으로 검찰은 보고있다.
정치권에서는 그동안 이들이 조성한 안기부 비자금이 사실상 김 전 대통령의 '통치자금'일 것이라는 설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김 전 대통령이 재임중 단 한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총선 등 정치일정을 소화해 내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할 수 밖에 없었고, 축근들은 이 같은 자금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누구의 감시도 받지않는 안기부 예산을 동원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김 전 대통령이 예산 전용을 통한 안기부의 비자금 조성, 총선자금 지원 사실 등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그 결과에 따라 정치권에 엄청난 회오리를 일으킬 전망이다.
황상진기자
april@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