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인이 지은 집'-길상호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당선자 길상호씨 인터뷰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고통은 '내 마음 속의 집'이 무너졌기 때문이 아닌가, 그 집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질 것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쓴 시입니다." 시 당선자 길상호(吉相鎬ㆍ28)씨는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런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면 좋은 시인은 못되더라도 좋은 사람을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라고 순박한 소년처럼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문예반 활동을 해왔고 지금은 대학원에서 현대시를 전공하고 있는 문학도이지만 길씨의 신춘문예 응모는 이번이 처음이다. 첫 응모에서 그는 1만여편 가까운 응모작 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당선의 기쁨을 안았다.
"당선 통지를 듣고 너무 쑥스러웠습니다. 첫 응모라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고 더 다듬어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부터 정말 큰일이구나' 하는 걱정부터 드는군요."
길씨는 자신이 아직은 꿈에 많이 치우쳐있지만 '꿈과 현실이 어우러질 수 있는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시가 안읽히는 시대, 시의 위기라는 말들을 하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은 할 일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줄 수 있는 것들은 언제 어느 세상에고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시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누구보다 기뻐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길씨는 농사를 짓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 아래 5남 5녀중 아홉째다. 앳돼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의 그는 상기된 얼굴에도 뚜렷한 어조로 자신의 시관을 피력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당선자 길상호씨 소감
언제부터인가 집에 대한 생각이 쾅쾅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몇 달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집이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새벽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들여놨다가 좁아서 나가버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 뚝뚝 떨어져 돌아서 버리고, 누구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허술한 집을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담을 다시 쌓아주면서, 새는 지붕을 덮어주면서 저의 집을 지탱해준 사람들. 그들 때문에 마음속 집은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따뜻한 집 한 채 세우고 싶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시를 쓰는 일은 저에게 집을 짓는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아직 서툴기만 한 저의 집짓기는 언제 끝이 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머리칼 허연 노인이 되어도 끝끝내 그 아름다운 집을 이루겠다는 마음 변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기대도 앞으로 튼튼한 기둥으로 저를 받쳐줄 것입니다. 선생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많은 지도와 관심을 베풀어주신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강정희ㆍ신익호ㆍ김균태 선생님 외 여러 선생님들, 문예창작학과의 김완하 선생님, 글쓰기의 고통을 함께 했던 청림문학동인회 선후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누구보다도 부모님께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더욱 힘찬 걸음으로 걷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약력
▦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 1999년 한남대 국문과 졸업
▦ 한남대 국문과 대학원 재학중
■시부문 심사평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편이나 이번 시 부문 심사만은 그렇지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 여러 편 있었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김상호의 '그 노인이 지은 집', 김남극의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 정선용의 '달팽이', 박판식의 '장지', 최요기의 '2월의 강' 등 모두 다섯 편이었다.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은 역동성과 천진성이 돋보였으나 '가련한 생들 아니랴'와 같은 미숙한 표현이 지적되었다. '생'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고 생을 노래하는 것이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달팽이'는 달팽이에 대한 생태학적 관찰을 통해 인간의 생태학적 여정을 충실히 그린 작품이었으며 , '장지'는 할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와 통닭을 먹는 나와 가족들의 회한과 상처를 깊게 그리고 있었으며, '2월의 강'은 침묵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 노인이 지은 집'에는 못미치는 작품이었다.
'그 노인이 지은 집'은 군계일학이었다. 한 편의 시가 마치 한 권의 책과 같은 질량감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런 무리 없이 균등한 밀도를 바탕으로 통일감을 형성한 점이 크게 돋보였다.
특히 서사적 요소에 서정적 요소를 차근차근 잘 어우러지게 한 데서 오는 감동이 커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 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 한때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던 현실참여라는 짐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자는 부디 노력을 통해서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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