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 한국평균가정 박정인씨 가족새해 아침은 넉넉지 못한 이들에게도 풍요롭다. 장사가 잘 안되거나 일자리가 불안하더라도 잠시나마 걱정을 떨치고 언제나 그래왔듯 올 한해도 열심히 살아볼 것을 다짐해 본다.
우리 역사가 고통 속에서도 그나마 조금씩 진보해온 것은 매년 이런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는 보통 사람들의 덕택이다. 그래서 새해를 즈음해 명사(名士)도, 사장님도 아닌 가장 평범한 우리의 이웃을 만났다.
통계청에 의뢰해 찾아낸 '한국의 평균가정'은 박정인(朴正仁)씨 가족. 가장인 박씨는 ▦올해 40살로 ▦경북 영덕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전문대를 졸업한 뒤 ▦1981년 한국통신에 입사했으며 ▦88년 경기 부천시 광케이블 시공업체로 옮겨 현재 팀장으로 근무 중인 사람이다.
평균적인 이력만큼이나 박씨의 외양이나 성격도 어딘가에서 자주 마주쳤을 듯 싶게 친숙하다.
크지 않은 키에 다소 마른 체격, 볕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 사람 좋아 보이는 수줍은 미소, 과묵한 성격 등.. 아내 서수미(徐守美ㆍ37)씨도 "이웃집 아저씨같은 분위기야 말로 우리 남편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말한다.
박씨 부부가 두 딸 지연(智燕ㆍ10ㆍ서울 강월초등 4) 진숙(鎭淑ㆍ8ㆍ강월초등 2)양과 함께 살고 있는 서울 양천구 신월7동의 연립주택은 15.5평 규모의 작은 공간. 하지만 벽에 걸린 '거짓말하지 말자'라는 가훈과 가족여행 때의 사진들이 넉넉지 않은 살림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따뜻한 가족애를 느끼게 한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박씨 부부는 보증금 300만원 짜리 방 한칸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한 뒤 이를 악물고 돈을 모았다. 당시의 박씨 월급 60만원과 서씨 월급 30만원은 거의 은행 통장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94년 5,500만원 짜리였던 지금의 집을 샀다. 그러나 돈이 모자라 바로 들어가 살지 못하고 한동안 전세를 줘야 했으며, 은행에 500만원의 빚도 졌다. 1년만에야 전세금을 빼주고 처음 '내 집'에 이사하던 날 부부는 밤새도록 벽과 방바닥을 어루만지며 감격에 겨워 했다.
요즘 가족의 수입은 봉급 170만원과 보너스를 포함, 월 200만원 남짓한 박씨의 수입이 전부.
부인 서씨는 결혼한 지 2년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수입이 더 많은 모자 미싱부업을 시작했으나 두 딸을 돌볼 시간을 내려고 3년전 이 일도 그만뒀다.
"작은 돈이라도 아끼기 위해 네 식구 모두가 각자 자신의 가계부를 쓴다"며 박씨가 내보이는 대학노트 4권에는 지출내역들이 단돈 10원 단위까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부부의 가계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지출항목은 아이들 교육비. 학원, 학습지, 피아노, 미술학원, 재즈댄스 교습 등에 총 50만원이 들어갔다. "두 딸만은 부족하지 않게 해줘야 겠다는 생각에 교육비만은 아끼지 않는 편입니다."
반면 노랭이 작전으로 공과금은 월 20만원, 반찬값은 25만원을 넘기지 않는다. 박씨의 한달 용돈도 30만원에 불과하다. 술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점심도 가장 싼 곳만 찾아다니기 때문에 가능한 액수다. 아끼고 아껴 남는 돈 80만원이 매달 정기적금과 보험에 들어간다.
차곡차곡 모은 돈이 어느새 5,000만원을 넘겼다. 박씨는 저축액을 얘기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 돈으로 사업을 해볼까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적성이 아니다 싶더군요. 적절할 때 집을 늘리고 우리 딸들 시집갈 때도 조금 보태기로 했습니다."
박씨 부부는 결혼 이후 한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 서씨가 볼멘 소리로 '도발'을 해보기도 하지만, 아무말 않다가 나중에 "미안해"라고 한마디 던지는 남편에게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취미라고 할만한 박씨 가족의 유일한 가족놀이는 저녁상을 치운 뒤 이부자리를 펴놓고 네 식구가 함께 뒹굴면서 하는 '레슬링'. "돈 안들고 재미있잖아요"라고 말하는 두 딸도 엄마?아빠의 알뜰함을 그대로 닮았다.
이은호기자
leeeunho@hk.co.kr
■82년 첫 '평균한국인' 배기영씨
한국일보는 1982년 신년 특집에서도 통계청의 협조로 '평균 한국인'을 찾아내 서민 특유의 풋풋한 삶을 그려낸 적이 있다.
당시 '평균 한국인'은 김포교통 버스기사 배기영(裵基英)씨. 36세였던 그는 반백이 된 지금도 당시 서울 강서구 방화2동 집 부근에서 아내 김수자(金壽子ㆍ52)씨, 아들 정수(正秀ㆍ28) 딸 정은(靜恩ㆍ26)씨와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배씨 가족은 1990년 큰 위기를 맞았다. 배씨가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하늘이 도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이후 직장에 제대로 나가지 못하면서 2년여간 돈 가뭄 속에서 지내야 했다. 백씨는 "집사람이 파출부로 나가고 국밥집을 하지 않았다면 네 식구 모두 꼼짝없이 굶어 죽었을 것"이라며 아내의 어깨를 툭툭 쳐준다.
92년 김포교통 사장의 배려로 배씨가 주유소 소장 자리를 얻고 나서야 생활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배씨의 건강도 많이 회복돼 지난해부터는 승합차를 사서 학원과 유치원 아이들을 통학시키는 일을 하게 됐다.
아들 딸도 직장을 구해 배씨의 짐을 덜어주고 있다. 아버지가 해병대에서 진짜 사나이로 거듭난 것을 부러워하던 정수씨는 고교를 졸업하고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제대 후 사업을 시작했다가 3,000만원의 자본금을 몽땅 날리기도 했지만 해병 출신다운 패기로 난관을 극복하고 지금은 자동차 영업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정은씨는 전문대를 나와 5년전부터 스튜어디스로 일하고 있다. 20년전 집에 같이 데리고 있던 배씨의 세 동생은 모두 배필을 구해 집을 나갔다.
82년 당시 30만4,000원이었던 배씨의 월수입은 현재는 100여만원으로 늘어나고 남매도 월 100만 가까이 도와줘 외견상 수입은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풍족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 배씨네 형편이다. "수입은 거북이 걸음이고 물가는 토끼뜀이니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이 식구들의 생각이다.
그나마 81년 1,580만원을 주고 산 연립주택이 지난해부터 재개발돼 시가 1억5,000만원의 번듯한 집으로 변하게 된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배씨 가족들은 공사가 빨리 끝나 현재 사는 전세집에서 원래 보금자리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어떻게 해서라도 '평균 한국인'에서 벗어나 잘산다는 소리 한번 들어 보고 싶었는데 여전히 평균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배씨는 "살다보면 언젠가는 괜찮아 질 것"이라는 희망을 잔잔한 미소로 전했다.
이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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