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비겁한 사무라이'였다. 10년전 혜성처럼 등장해 사무라이의 이미지로 페루의 기적을 외쳤던 후지모리는 이제 세계인들로부터 추악한 지도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모국 일본에서 숨어지내고 있다.일본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는 27일 요미우리(讀賣)신문에 기고한 회고록 첫회에서 일본에서 대통령직을 사임한 이유에 대해 "페루에서 사임했으면 후지모리파와 반 후지모리파 간에 엄청난 대결이 발생, 예측하기 힘든 폭력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페루에 돌아가면 현대판 이단자 심문을 받게 될 것"이라며 "근거없는 비난의 실체가 규명될 때까지 일본에 있겠다"고 덧붙였다.
그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라보는 눈은 싸늘하기만 하다. 대통령 3선 연임에 성공한 직후인 지난 6월까지만 해도 50%에 이르던 페루 국민들의 지지율은 최근 9%로 곤두박질했다.
특히 일본 정부가 그의 일본 국적 보유 사실을 공식 확인해주자 페루 국민들은 "일본 국적을 유지한 채 대통령을 세번씩이나 지냈다는 것은 페루 헌법을 농간한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는 불법대통령"이라고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를 표시했다.
일본인 이민 2세로서 1990년 대통령에 당선된 후지모리는 페루의 고질적인 고민이었던 인플레와 좌익게릴라를 퇴치하는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효력을 정지시키거나 부정선거를 꾀하는 등 독재자의 길을 걸으면서 부패의 늪에 빠졌다.
일본과 스위스에 수백만불의 재산을 은닉해두었다는 소문과 콜롬비아 마약 밀매업자나 국가자산을 빼돌리는 범죄집단과의 유착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그의 종말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지난 9월 자신의 심복이면서 국가 정보부장이던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가 야당의원을 매수하는 현장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공개된 것이다.
폭로과정에 1996년 이혼한 부인이며 야당의원인 수산나 히구치가 깊이 관련됐다는 주장까지 있어 그의 몰락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결국 그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게도 e메일로 사직서를 페루에 보내고 일본에 눌러앉았다.
후지모리는 해외이주 성공신화의 주인공에서 하루아침에 권력과 명예, 가정까지도 잃었다. 하지만 페루 정부가 그의 소환을 끈질기게 요청하고 있어 그의 말로는 더욱 험난할 것 같다.
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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