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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단절의 처음'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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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단절의 처음' 새해

입력
2000.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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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오늘에 이르면 사람들은 누구나 세밑을 이야기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한 해가 그 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때가 되면 누구나 회한(悔恨)을 가슴에 담습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내 삶의 뒷녘에 사려지지 않는 긴 가닥처럼 아쉬움이 그림자를 드리기 때문입니다.하지만 세월은 거꾸로 흐르지 않습니다. 거듭 흐르지도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내가 흘러온 삶을, 또는 내가 살아온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인데, 어쩌면 영원한 기록일 터인데, 회한의 순수나 그 지극함으로도 이미 산 세월을 되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밑은 온통 잿빛입니다.

하기야 회한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그러한 '어리석은 태도'를 버리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좋았던 일, 새삼 긍지가 솟는 일들이 되돌아보면 없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바탕 삼아 새로운 세월을 맞으면 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살아온 삶의 흠을 드러내는 일은 '지혜롭지 않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잘한 일, 자랑스러웠던 일을 찾아 그것을 한껏 크고 화려하게 꾸밉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부지런히 자기를 정당화합니다.

자기 합리화를 위해 산뜻한 논리를 구사하고,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낯선 '의미'들로 자기를 치장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스스로 지나온 세월을 '감사'하고 '감격'하기조차 합니다. 마땅히 세밑은 이러해야 합니다. 우울한 그림자로 이 시절을 채색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이 건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적극적으로 사는 일,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편이 회한으로 한 해를 마감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태도보다 훨씬 '생산적'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적극성이나 긍정성으로 보상할 수 없는 '기만'을 담을 수 있습니다.

자기도 남도 속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기만의 결과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속인 것이든 자기를 속인 것이든 '자기 파멸'에 이릅니다. 그러니 회한이 아무리 거추장스럽다 할지라도 세밑을 이렇게만 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밑에 이르러 밀물처럼 밀려드는 회한을 떨어버리는 길, 그것을 넘어서는 길은 하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아예 세월을 끊어버리는 일이 그것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말입니다만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새해 새날을 맞는 일, 좋았던 일도 한스럽던 일도 지난 세월에 담아 다 흘려보내고 새날 새 아침에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그렇게 새 시간과 새 누리로 새해를 맞는 일, 새해가 그렇게 되도록 세밑의 회한을 넘어서는 일만이 이 시절을 사는 삶의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지난 좋았던 일, 이미 지난 부끄럽고 한스럽던 일들로 새해가 펼치는 새 가능성을 미리 얼룩지게 하는 것은 새해를 맞는 예의가 아닐 듯 합니다.

회한.감격 흘려보내야

물론 이런 생각은 다만 꿈입니다.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역사를 벗어날 수도 없거니와 시간이란 단절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새해는 이미 단절을 전제한 처음입니다.

그러므로 새해는 그것이 이어진 시간의 마디라 할지라도 새 창조를 위한 분명한 계기입니다. 따라서 새해는 '연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절을 획(劃)하고 비롯하는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세월을 끊어 되시작한다는 것은 꿈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밑을 지내며 새해를 맞는 시절이 갖는 뚜렷한 '현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회한과 감격마저 낡은 해에 실어 흘려보내야 하는 것이 세밑의 윤리인 것입니다. 세밑을 이렇게 보내고 싶습니다.

새해를 이렇게 맞고 싶습니다.

/정진홍ㆍ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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