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법이 잘못 뒤섞이면 정의와 상식은 실종된다. 올해 각국에서 벌어진 몇 가지 정치사건들은 이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다. 법이 정치의 발목을 잡거나 정치가 법정의를 훼손하면서 민주주의의 원칙, 민의의 실현에 대해 회의와 의문을 제기한 한 해였다.지난 11월 7일부터 36일간 펼쳐졌던 미국 대선 법정드라마는 법의 이름을 빌어 치러진 정치의 대리전이었다. 법치의 최후 보루라고 여겨졌던 연방 대법관들이 시중의 정파적 견해가 그대로 드러나는 분열상을 보임에 따라 법원의 존엄성은 손상을 입었다.
미국민들의 자존심과 국가적 위신도 적지않은 상처를 입었다. 공화당 후보였던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와 민주당 후보였던 앨 고어 부통령이 플로리다주에서 벌인 대혈투는 미국 민주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을 낳았다.
플로리다주 정부와 의회, 연방 대법원은 부시의 깃발 아래서 움직였고 민주당 성향의 주 대법원은 두 번씩이나 고어의 편에 서주었다. 이로 인해 주 정부와 법원이 갈등을 빚었고 주 의회가 법원의 결정을 비난했으며 주 대법원과 연방 대법원이 힘겨루기를 해야 했다.
특히 지금까지 주정부의 권한확대를 외쳤던 연방 대법원과 공화당, 반대로 연방정부의 개입을 역설했던 민주당이 모두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것은 모순의 극치였다.
전 칠레 군부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둘러싼 재판은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1973년 군부 쿠데타 직후 군경요원들로 '죽음의 특공대'를 만들어 정치범 75명을 납치, 살해한 전범 피노체트는 국제소추를 거쳐 칠레 국내법원으로 옮겨갔지만 잔존 세력들의 반발로 그를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
칠레 대법원이 지난 20일 검찰 공소기각을 내린 데 이어 검찰의 직접신문을 일정을 돌연 연기함으로써 독재자에 대한 법의 심판은 물건너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또 보스니아 및 코소보 내전 당시 반인륜적 악행을 저지른 구유고 내전 전범들을 단죄하기 위한 전범재판소가 설치된 지 7년이 지났건만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등 당시의 주역들이 죄값을 치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전쟁 전후에 민간인에게 행해진 살인, 섬멸, 노예화, 추방 및 기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의한 박해행위를 처벌한다'는 뉘른베르크 국제 군사재판소 헌장도 빛을 잃고 있다.
하지만 이달 초 도쿄에서 비정부기구(NGO)가 중심이 돼 개최한 군대위안부 관련 국제 전범재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법적구속력은 없지만 국제사회에 경각심을 일깨워주면서 억울하게 희생된 그들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정치 권력은 법과 원칙을 앞세우면서도 어느 순간 그것을 기꺼이 희생시킨다. 국제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주의와 정의, 평화와 인권을 꿈꾸었던 새 천년 첫 해도 많은 아쉬움과 교훈을 남긴 채 저물어간다.
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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