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는 생명이 짧다. 짧은 만큼 점화력은 강렬하다. 유행어는 당대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대중의 욕구를 가장 치열하게 반영하는 말이기 때문이다.올 문화계는 클래식 문화와 대중 문화의 무게 중심이 새롭게 자리잡는 한 해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양상으로 나타났던 '크로스 오버'는 올 문화계의 가장 두드러진 거시적 흐름이었다.
드라마 '허준'이 인기를 끌면 허준을 둘러싼 역사 논쟁이 가열되는 양상이었다. 대중 문화의 흐름이 순수 문화에까지 역동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난타' 같은 대중적 공연이 인기를 끌고, '인상파전' '러시아미술전' 등 '유명세' 있는 전시회에만 관객이 몰렸다. 순수 문화를 접하는 대중의 저변이 넓어진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지만, 순수 예술 역시 '이벤트' 적인 성격을 담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기도 하다.
올 최고의 유행어는 역시 '엽기'이다. MBC '21세기 위원회'가 6,000명 네티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엽기'는 단연 올해 최고 히트 언어로 조사됐다.
일본의 엽기가 구토, 섹스, 시체 등에 집착하는 변태적 성격이 강하다면 우리나라의 엽기는 '코믹'함과 맥이 닿아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버지 난 누구예요"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같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 만들어내는 기괴한 풍경 역시 '엽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 난 누구예요" "난 공짜가 좋아" 코믹성 엽기 특정
'공짜가 좋아'라는 말의 유행은 mp3등 인터넷을 통한 컨텐츠의 광범위한 무료 유포 현상과도 잘 맞아 떨어지는 말이었다.
2000년 한국의 풍속도는 'TV가 언어를 지배한다'는 말이 들어맞을 정도로 그 영향력이 막강했다. CF 유행어인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는 신세대의 일회성 사랑을, '날 물로 보지마'는 신세대의 자기 주장을 담았다. 드라마 유행어로는 '허준'의 '감축하옵니다' , '가을 동화'의 '너의 죄를 사하노라'도 빼놓을 수 없다.
둘이 모이면 '삼행시' 셋이 모이면 '개인기'
연초 불기 시작한 '삼행시' 바람은 휴대전화 메일 유머로 이어졌고, 최근엔 '개인기'가 유행이다. '삼행시'는 상대방이 운을 떼면 즉석에서 '시를 가장한' 유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언어 파괴는 채팅 세대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사례이다. '난 원래 널.....뛰기 선수였어' 같은 유머는 제한된 휴대전화 LCD창의 크기의 '허'를 찌른 유머다.
'모임 7시. 개인기 준비하기 바람' 이젠 '민간인'도 연예인처럼 개인기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둘이 모으면 삼행시, 셋이 모이면 개인기'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아무래도 TV 쇼의 영향이 크다. 가수를 불러 노래 대신 입담 경쟁을 시키는 일련의 쇼 프로그램의 파급력은 예상외로 파장이 컸다. 김대중대통령의 말투나 "섭섭합니다요. 행님"처럼 조직폭력배의 말투를 흉내내는 '개인기'가 가장 흔하다.
특기할 것은 올들어 전라도 사투리의 파급력이 매우 커졌다는 것이다. 성대모사, 춤, 묵찌빠 유머("묵찌빠 묵찌바 묵은 무엇"하는 식으로 일종의 삼행시를 만드는 것) 등이 가장 흔히 쓰이는 개인기이다.
상대방에 관심 보다는 '잼(재미)있으면 짱(최고)"이라는 요즘의 세태가 반영된 이 개인기 바람은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관심은 축소된 개인주의적 상황의 대표적인 상징이다.
'커밍 아웃(동성애자 선언)'과 '섹스 비디오'도 닳아 빠질 정도로 많이 유포된 단어이다.
두 사건은 우리나라의 이중적 성 잣대가 적나라한 모순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개그맨 홍석천씨가 커밍 아웃을 계기로 사실상 방송에서 '퇴출' 됨으로써 개인의 성적 자유보다는 관습의 벽이 높음이 인정됐다.
그러나 가수 백지영의 섹스 비디오가 그토록 빠른 속도로 유포된 것은 역시 성적 기준이 엄격한 나라일수록 '엿보기'에 대한 욕망도 그만큼 높다는 사실을 반증한 셈이다.
우리나라 성인남성의 인터넷 이용도를 높이는 데 가장 공헌한 것이 바로 'O양 비디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에 파고가 있는 법. 이런 유행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노자''공자' 등 고전과 더불어 '느림'에 관한 책도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 역시 본격적인 뿌리 내리기 보다는 유행적 성격이 강했다.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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