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연말 결단' 얘기로 떠들썩하던 보름전쯤 한 여권 고위 인사로부터 들은 말이다. "내각 개편을 해보았자 약효가 며칠이나 가겠습니까?" 국정쇄신 방안의 하나로 개각을 한들 그 효과가 얼마나 가겠느냐는 걱정이었다.개각이라면 현 각료들에 대해 경제난 등 잘못된 정책 결과의 책임을 묻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하는 것일 터인데, '충격 요법' 정도로 생각하는 발상에 놀랐었다. 설마 DJ는 국정쇄신이니, 결단이니 하는 말을 그런 저차원적인 전략적 사고에서 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같은 무렵, 지금은 정계를 떠나 종교ㆍ사회 활동을 하는 한 전직 의원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국민 누구나가 존경하는, DJ와도 남다른 관계인 종교계 지도자 한 분이 얼마전부터 '달라진 듯한 DJ' 에 대해 안타까워 한다는 것이다.
이 교계 지도자를 자주 뵙는 이 전직 의원이 보기에, 이 분은 김 대통령이 민심과 거리가 있는 현실 인식을 하고 있거나, 쓴 소리는 듣기 거북해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다 지난 얘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요즘 여권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 보면 여권 핵심 인사들이 과연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자민련과의 공조 복원이니 합당이니 하는 얘기가 우선 그렇다. 여권 사람들은 민심이 이탈한 것이 이 정부가 수(數)가 부족하고, 힘이 없기 때문인 것으로 알고 있는 지 궁금하다.
민주당은 자민련을 '유인'하기 위해 억지로 교섭단체를 만들어주려다 보니 무리수를 둔다. 지난 주에도 국회법 개정안을 소동끝에 국회 운영위에 또 상정했다. 그런데 이 국회법 개정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지난 여름 이 법안을 날치기 처리한 것이 이 정부가 현재 처한 위기의 서막이었다.
민주당이 자민련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려는 것은 돈(정당보조금)을 많이 받게 해주겠다는, 말하자면 보상책이다. DJ 정부가 '수'에 집착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DJP 공동정부의 명분은 이제 사라졌다.
탄생 자체가 내각제를 고리로 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이미 끊어졌다. 현실적으로도 운영에 실패했다. 개혁 부진과 국정 난맥의 상당 부분이 공동정부의 구조적 한계에서 잉태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민련은 지난 총선에서 '공동정부 철수'를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았다.
DJ 정부가 자민련을 끌어들이려는 것은 결국 정권 재창출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데 민심이 떠난다면 그것도 다 헛일이다. DJ는 그보다 개혁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광주 지역 17개 시민단체가 최근 "그동안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지켜 보았다"며 발표한 시국선언문에서 가장 통렬히 비판한 것도 '개혁의 실종' 이었다.
개혁을 위해서라도 다수 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겠지만, 자민련과의 공동정부 복원으로 개혁에 박차가 가해질 것으로 믿는 국민이 얼마나 있겠는가. 당장 내년 초 개각때 자민련에 또 다시 장관직을 몇 개 할애하면 새 내각을 '개혁 내각' 이라고 볼 국민이 과연 있을까.
김 대통령이 27일 기자간담회에서 "전혀 아는 바 없다"고 부인했으니 사그러들겠지만 최근 불거졌던 정계개편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치는 현실이라지만 다수 세력이 구축된다고 국민 지지도 그만큼 상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 현실에서 야당을 자극, 여야간 대립과 반목이 심화하면 도대체 개혁을 추진할 수 있겠는가. 경제 살리기는 또 어떻게 되겠는가. 정부ㆍ여당이 적은 수로도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야당이 정략적으로 발목을 잡는다면 국민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DJ의 정계개편 부인 발언도 이를 잘 알고 나온 것이라고 믿는다.
최규식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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