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렇게 했더라면."2000년 경제농사는 '흉작'이었다. 나스닥 침체나 유가폭등 같은 불가항력적 악재도 많았으나, 정부는 경제흐름을 좌우할 중요 고비 때마다 눈앞의 혼란만 피하려는 단기미봉책을 반복함으로써 결국 오늘의 복합적 경제난을 자초했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성립될 수 없지만, 그때 그렇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2000년 경제적 패착사례'들을 정리해본다.
1.현대사태, '왕자의 난'때 정면돌파했더라면
1년 내내 금융시장을 휘저었던 현대사태. 3월 '왕자의 난'이래 투신위기, 자동차 계열분리 공방, 건설 1차부도 등 현대문제는 월례행사처럼 반복됐다.
하지만 정부는 매번 "현대는 대우와 다르다"며 어정쩡한 자구계획만으로 사태를 봉합했다.
정부가 '왕자의 난'때 원칙(법정관리 불사)대로 밀고나갔더라면, 한국경제는 현대의 짐을 일찍 벗을 수 있었을 것이다.
2.공적자금, 6월전에 시인했더라면
공적자금 추가조성 필요성은 연초부터 제기됐지만, 4ㆍ13 총선을 앞둔 이헌재(李憲宰) 경제팀은 그 얘기를 꺼내지 못했고, 결국 8월까지 '시장이 다 아는 추가 공적자금 조성을 정부만 부인하는'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다.
정부가 추가조성 필요성을 일찍 시인했더라면, 불필요한 공적자금 공방과 시장 불확실성은 줄어들었을 것이고, '은행감자(減資)'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3. 대우차 매각, 협상만 똑바로 했더라면
대우자동차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던 미국 포드자동차가 9월 돌연 '백지화'통보를 통보해 7조원의 매각대금과 함께 대우로 상징되는 부실기업정리 작업이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원인제공자는 분명 포드였지만 정부는 애당초 우선협상대상자를 복수로 정하지 않고 포드 1곳만 지정하면서, 협상결렬시에 대비한 최소한의 배상장치도 마련해두지 않는 미숙함을 보였다.
4. 정책당국자, 입조심만 했더라면
시장을 안정시켜야 할 정부당국자가 오히려 시장불안을 부추긴다면? 상호신용금고업계가 고사위기에 몰렸던 이달 초 이기호 경제수석은 "문제있는 금고가 1,2곳 더 있다"며 예금인출사태에 기름을 부었다.
국민ㆍ주택은행의 합병논의가 물밑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던 이달 중순엔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이 두 은행의 합병협상 사실을 공개, 노조에 반격기회를 제공했다.
5. 11ㆍ3조치가 8ㆍ3조치가 됐더라면
11ㆍ3 퇴출조치는 '몰아치기' 구조조정의 전형이다.
부실기업 정리는 올바른 조치지만, 그렇지 않아도 경색된 금융시장은 기업들의 대량 퇴출에 더욱 마비됐고, 경기침체기 특히 겨울철에 실업자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실물경기가 좋았고, 실업률도 3%대까지 떨어져 충격흡수여력이 넉넉했던 8월 이전에 상시퇴출 방식으로 진행됐더라면 부작용은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6. 부실은행정리, P&A방식 배제하지 않았더라면
부실금융기관 정리의 교과서적 해법은 자산부채이전(P&A) 방식. 돈도 덜 들고, 고용승계 의무도 없는 퇴출조치다.
그러나 5월 정부는 2단계 은행구조조정 추진계획에서 "퇴출은 없다"고 일찌감치 못박았고, 7월 금융파업때 노조측에 이를 문서화해줬다.
노조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지만, 그 결과 성공여부가 불투명하고 돈도 많이 드는 지주회사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7. 이익집단에 조금만 과감했더라면
의사, 약사, 노조, 교사, 농민.. 누구든 많이 모여서 목소리만 높이면 뭐든 손에 쥔다. 이익집단의 요구에 정부가 한없이 끌려다니기 때문.
4ㆍ13 총선을 앞두고 대우차 매각협상을 벌이면서 5년간 완전고용을 보장하고, 도로점거 농민들에게 부채탕감을 약속하는 등 사례는 헤아릴 수 조차 없다. 노조의 반발에 공기업민영화 등 공공개혁도 발목이 잡혔다.
8. 경제팀, 조금만 덜 흔들었더라면
2000년 한해 동안 경제팀장만 3명이었다. 4ㆍ13 총선에 차출돼 1월 물러난 강봉균 전 재경부장관의 재임기간은 8개월.
후임 이헌재 장관은 수명이 한달 단축된 7개월(1~8월)이었다. 취임 5개월도 되지 않은 진념 현 장관도 현재 개각설에 휘말려있다.
경제사령탑을 마구 흔들어대고, 툭하면 바꿔버리는 경제가 잘 된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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