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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 16절 갱지 한장도 아끼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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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 16절 갱지 한장도 아끼던 마음

입력
2000.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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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대를 다녀온 뒤 1973년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사무소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배고픔을 면해보자고 한창 새마을운동이 불붙기 시작할 무렵인 그때의 면사무소 사무용품은 형편없었다. 서류의 재질은 몽땅 16절지 갱지였고 필기구는 볼펜 한자루가 고작이었다.

또 문서를 등사하기 위해 많은 용지가 필요할 때면 꽥꽥이 총무계장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자물통이 달린 창고문을 열고 16절지 한타(500장)를 겨우 얻어낼 수 있었다.

그 싯누런 16절 갱지일망정 한 면을 쓰면 그냥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뒷면에 농지세 소표나 농가별 퇴비생산시달서 따위를 등사해 재활용해야 했다.

문서를 정리해야 할 때는 폐기해야 할 문서철에서 쓸 만한 이면지를 몽땅 추려냈고 흑표지나 철근까지 한 묶음 챙겨 다시 활용해 썼다. 볼펜 심 하나까지 다 쓴 것을 총무계에 보여주고 타 쓰던 때라 당시 면사무소 직원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절약하며 근무했었다.

세월이 흘러 어언 27년, 지금은 어떤가. 내가 근무하는 철원읍사무소만 해도 컴퓨터가 직원들 머리수대로 책상을 차지하고 있고 16절 갱지에 비할 바 아닌 고급복사지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쓰고 있다.

가리방(등사판)의 검은 유액을 더 이상 손에 묻힐 필요가 없고 형형색색의 호화로운 필기구를 필통에 한 무더기씩 꽂아 놓고 쓴다. 희디흰 고급 복사지가 문서철을 꽉꽉 채워 나가고 그보다 더욱 많은 양의 복사용지가 폐기돼 함부로 버려지고 있다.

난 그게 너무도 아까워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젊은 직원들에게 이면지를 활용하라, 폴더를 다시 활용해 써라 잔소리를 하면 그들은 '제 봉급으로 샀나, 별꼴 다보겠다'는 듯이 떨떠름한 기색이다. 요즘처럼 연말에 문서정리할 때는 더욱 가관이다. 종이도 그렇지만 폴더와 흑표지 또한 얼마나 고급재질인가. 한해 쓰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깝다. 몇해를 써도 끄떡없을 것들이 몽땅 폐기된다.

그처럼 아까운 것들을 모두 버리고 다시 예산을 들여 사 쓰고 있으니 IMF가 왜 오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엔 3년전과 꼭 닮은 경제위기와 대량실직의 한파가 이 겨울과 동무하여 우리앞에 닥치고 있다.

이런 판국에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공공기관 스스로 근검절약은 못할 망정 낭비의 향연에 빠져 있다니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27년전 동송면사무소의 그 가난한 풍경이 문득 그리워진다.

최춘명 강원 철원군 철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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