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력 70여년은 곧 한국어의 영토가 한 차원 확장되는 과정이었다. 미당의 부음이 20세기 한국시어의 조언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의 시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한국인의 마음 근저에 흐르는 가락을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로 표출한 결정체였다. 친일 행적과 5공화국 초기 친정권적 행위로 비난받기도 했지만,미당이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한 대시인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많지 않다."어디 소쩍새 소리 잘 들리는 방으로 좀 안내해 주어."
미당 서정주 시인은 올 한식에도 부인과 함께 질마재를 찾아 성묘를 했다. 전북 고창군 선운사 입구의 '동백장 여관' 주인은 미당이 언제나 '소쩍새 소리 잘 들리는 방'을 요구해 올해도 2층 한적한 곳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질마재는 그의 시력 70여 년을 관통하는 언어의 원형이 있는 곳이다.
질마재에서 그는 '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우름을 밤새 우렀다'('문둥이'에서)며 '생명'을 발견한다.
민중적 삶의 운명을, 끓어오르는 관능과 원죄의식에 지배당한 젊음의 언어로 토해내던 미당은 전쟁을 겪으며 '신라주의(新羅主義)'와 '동천(冬天)'의 세계를 거쳐 자신의 표현대로 "잘 맑힌 영혼의 영생의 길"로 나아갔다.
"미당은 입에서 말이 나오면 그대로 시가 된다." 문자사용에서 자유자재했던 그의 시는 천부의 토속적 언어감각에 한국적 질곡이 얹혀져 완성된 것이었다.
2000년의 끝자락에 전해진 미당의 부음은 20세기 한국 시어의 종언(終焉)으로 들린다.
미당의 시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 한국인의 마음 근저에 흐르는 가락을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로 표출한 결정체였다.
미당이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과 제5공화국 시절 친정권적인 행태로 비판받으면서 그의 생애 자체가 매도되기도 했지만, 그가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도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한 대시인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많지 않다.
미당은 올 10월초 부인 방옥숙 여사가 숨진 후 지병인 심장병과 전립선염 등 신병 치료차 아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영구 이주할 뜻을 밝혀 세간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급격한 병세의 악화로 미국행은 연기됐고 결국 조국에서 숨을 거뒀다. 노시인의 미국행 결심에는 자신의 생애에 대한 상반된 평가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100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시인' '시선(詩仙)'으로까지 불리면서도 몇 제자들 외에는 찾는 사람도 드문, 30여년 살아온 서울 관악구 남현동 자택에서 여전히 부인과 맥주잔을 주고 받으며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스스로 안타까웠을 것이라고 측근들은 말한다. 기자가 3개월 전 방문했을 때 그는 "서러워서 못살겠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당은 1915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곳은 그의 시 전체를 관류하는 토속적 분위기의 원형이 형성된 곳이었다.
그가 23세 때 쓴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었다/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있을뿐이었다/./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자화상'에서)는 식민지시대의 역사적 불모성, 누대의 가난을 뚫는 생명력을 벌거숭이 육성처럼 들려 주었다.
6ㆍ25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시는 휴머니즘이라는 영원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선조들의 생존방식을 궁구하면서 삼국사 연구에 골몰했다. 그 결과가 '신라초(新羅抄)'와 '동천(冬天)'이다.
5행으로 된 짧은 시 '동천'은 미당 자신이 서슴없이 "아낌 없는 내 정신의 에센스"라고 했을 정도로 간명한, 사랑의 시이기도 하다.
환갑을 넘긴 이후 그는 '떠돌이'를 자처하면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쓴 시편과 여행기들을 발표했다. 이 즈음 '영원한 정신적 생명' 곧 '영생(永生)'의 추구가 곧 자신의 시력이었다고 했던 미당은 스스로를 "평생 시만 써온 미련한 소"라고 비유했다.
'아내 손톱/말쑥히 깍어주고,/난초/물 주고 나서//무심히 눈 주어 보는 초가을날의/감 익는 햇살이여,//도로아미타불의/도로아미타불의/그득히 빛나는/내 햇살이여' 미당이 97년 여든둘에 발표한 이 시는 그가 타고난 시인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이즈음 그는 기억력 감퇴를 막기 위해 전 세계의 산 이름 1,625개와 각 나라 수도의 이름을 아침마다 왼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 시인 중에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시인을 찾기 힘들다. 박재삼(작고) 고은 이제하 황동규씨 등 수많은 시인들이 그에게서 감화를 받았다.
소설가 김동리씨와 박두진씨, 소설가 황순원씨 마저 별세함으로써 현대문학의 주춧돌을 놓았던 대가들은 거의가 세월의 힘에 스러져갔다. 미당의 타계는 이 점을 돌이키게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1,000여 편의 시는 한국 정신의 원형으로 남을 것이다.
미당 서정주 연보
▦1915년 전북 고창 출생
▦ 29년 서울 중앙고보 입학
▦ 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
▦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壁)' 당선, '시인부락' 창간
▦ 38년 방옥숙(方玉淑)과 결혼
▦ 41년 제1시집 '화사집(花蛇集)'
▦ 46년 제2시집 '귀촉도(歸蜀途)'
▦ 54년 예술원 회원, 서라벌예대 교수
▦ 55년 제3시집 '서정주 시선'
▦ 60년 제4시집 '신라초(新羅秒)', 동국대 교수
▦ 66년 예술원상 수상
▦ 68년 제5시집 '동천(冬天)'
▦ 71년 현대시인협회장
▦ 75년 제6시집 '질마재 신화(神話)'
▦ 76년 제7시집 '떠돌이의 시'
▦ 77년 문인협회장
▦ 80년 세계여행기 '떠돌며 머물며 무엇을 보려느뇨?', 제8시집 '서(西)으로 가는 달처럼'
▦ 82년 제9시집 '학(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
▦ 83년 제10시집 '안 잊히는 일들'
▦ 84년 제11시집 '노래'
▦ 88년 제12시집 '팔할이 바람'
▦ 91년 제13시집 '산시(山詩)'
▦ 93년 제14시집 '늙은 떠돌이의 시'
▦ 94년 '미당 전집'(전6권) 출간
▦ 97년 제15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 출간
■미당 시에 대하여
큰 시인을 가늠하는 척도로 우리는 많은 작품량, 창의적이고 독보적인 언어 구사능력, 독자적인 세계 이해의 여부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점에서 미당 서정주가 우리말 시인 가운데서 가장 큰 존재로 떠오른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어떤 말이나 붙잡아 놀리면 그대로 시가 되는 경지에 이른 미당은 뛰어난 방언의 요술사이다.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는 20대의 대담한 선포에서 '하늘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라는 60대의 공자의 습용(襲用)에 이르기까지 미당의 말씨와 말투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이다.
소월과 만해 이후 우리는 우리 시에 소리 지향과 산문 지향이라는 두 가지 경향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음악성을 지향해 음률적이 되려는 경우, 자칫하면 비싸지 못한 영탄이나 감상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안게 된다. 반면 사고와 깊이를 지향할 때 시인은 부지 중에 산문 쪽으로 근접해감으로써 음악성의 방기는 용납되고 만다.
음악성 지향이 가장 높은 성취를 보여준 것은 시집 '귀촉도'전후의 시기이다. '귀촉도'에는 '밀어''견우의 노래''꽃'같은 명편들이 수록돼 있는데, 그 반(反)산문 지향은 뚜렷하다.
깊이와 음악성이 공존하고 있는 절창으로서 '풀리는 한강(漢江)가에서'를 지목할 수 있다. '江물이 풀리다니 / 강물은 뭣하러 또 풀리는가 /우리들의 무슨 서름 무슨 기쁨 때문에 / 강물은 또 풀리는가.'
이 시는 생활인의 소회를 간곡한 정감으로 토로하여 비장미의 지경으로까지 높인 보기 드문 진정성의 생활 시편이다. 정감을 진정성으로 받혀주고 있는 것은 작품의 음률성이다.
소리와 깊이의 의젓한 균형이라는, 우리 시의 고전적 전범을 이룬 미당은 이후 대담하게 산문으로 근접해 가서 독자적인 깊이에 이른다.
미당 갑년(甲年)에 출간된 제6시집 '질마재 신화'는 시인이 서슴없이 산문을 채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뜻 깊은 시집이다. 여기서 '서슴없는 산문체'라고 하는 것은 되풀이나 기쁜 리듬을 통한 산문시의 흐름을 아예 외면하고 산문의 걸음걸이를 채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밀껍질이라도 아직은 좀 남었으니 부자같구나. 을사년 무렵 어느 해 봄이던가, 나와 너의 할아버지는 이 쑥버물이에 아무것도 곡기 넣을 게 없어서 못자리의 흙을 집어다 넣어 끄니를 에우기도 했었느리라.'('대흉년'부분)
한 인간에 대한 도덕적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적 유용성과 우월성은 홀대 받지 않는 법이다. 미당은 청년기에 '시인부락'이라는 시 동인지의 동인이었고, 반세기 후 그는 시인부락의 족장이 되었다.
이 족장에 대한 이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한국과 같이 척박하고 풍파 많은 사회에서 한길에 정진해 전례 없는 성취를 보여준 재능은 존경 받아야 하며 그 성취는 널리 수용되고 음미되어야 한다.
유종호(문학평론가.연세대 석좌교수)
■모처럼 눈이 내려 청랑한 마음이었는데 비통한 소식이 들이닥친다. 월여 전 사모님 돌아가신 뒤 한사코 식음을 마다하실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긴 하지만, 당신 스스로 의지를 일으켜세우고 배려를 한 듯한 스승의 이런 마무리에 그저 가슴이 막힐 밖에 도리가 없다.
미당 선생의 타계를 슬퍼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그 근원적인 삶의 불꽃같은 수많은 시와 절구(絶句)들이 새삼 마음에 사무치고 메아리쳐서일 것이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자화상)에서부터 '문 열어라 꽃아!'(꽃밭의 독백)에 이르기까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서풍부)에서부터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동명시)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그 생애에 걸쳐 시로 천착하고 포용한 정신의 깊이와 넓이는 '장돌뱅이 팔만이와 복동이가 사는 골목'에서부터 신라, 서역, 고대(古代)를 아우르며 사해(四海)에 이른다.
구순을 눈앞에 보면서도 여일하게 타오르던 그 시혼(詩魂)이나 그런 열정으로써 라거나, 한 세기에 어쩌다 운좋게 한번쯤이나 만날 수 있었던 위대한 시인으로서 라거나 그런 세속의 일들로써 뿐이 아니라, 이 척박한 나라에서 문학에 종부하고 종언한다는 일의 운명이란 것에까지 생각이 미쳐 아마 그럴 것이다.
동란 때 한동안 실어증에 시달렸던 스승의 일화같은 것도 있지만, 그런 질곡과 변혁과 고통들을 통째로 그러안지 않고 어떻게 그런 시편들이 씌어질 수가 있었겠는가.
공덕동 우거에 기거하던 때의 스승의 모습을 두고 필자는 한 그루 살구나무와 그 주변의 후덕한 광채를 중언부언한 적이 있지만,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표표한 두루마기 차림이나 그 눈빛이 새삼스럽다. 어느 후미진 그늘도 예사로 지나치지 않으면서 세상의 중심에 닿아있는 듯한 그 눈빛이 당신의 그 통절한 절구들과 절로 맞물리는 것도 그 탓일 것이다.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범한 시구가 싸안고 있는 이 온당치 않은 세계의 슬픔이나 그것을 다스리는 중용의 정신 같은 것은, 여전히 이 땅에서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않는 초승달을 끌어와 곤히 잠든 품팔이 아낙의 눈썹에다 당신은 것을 얹어주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 폭과 깊이라고는 하지만, 스승의 그것은 끝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다만 전율할 따름이다.
이 나라 문학을 지탱시켜 왔던 지주(支柱)의 굵기로나 그 영향들을 새삼 되뇌어 무엇하리오. 무시로 댁에 드나들며 침식을 예사로 알던 저 수많은 제자들, 당신을 사랑하던 그 모든 국민들이 지금 슬픔에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명복하소서.
/시인ㆍ소설가 이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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