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 혁명의 열기가 활화산처럼 분출한 한 해였다. 한국 바둑은 중국과 일본의 맹추격을 따돌리며 '세계 정상'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지만, 10년 넘게 한국 바둑을 과두통치해 온 '정상 4인방'체제는 추풍낙엽처럼 무너져내렸다.밖으로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맹주로서 위세를 떨치는 사이, 안으로는 사상유례 없는 변란(變亂)으로 영토가 갈기갈기 찢겨나간 해였다.
그리고 4인방 철옹성을 무너뜨린 반상 쿠데타의 주역이 10대와 스무살 언저리의 '무서운 신예들'이라는 점에서 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희망적이고 고무적인 전환기였다.
▲'4인방 독과점'에서 '춘추전국시대'로
1980년대 말 이후 '신산(神算)'이창호를 필두로 '바둑황제'조훈현, '세계 최고의 공격수'유창혁, '야생마'서봉수 등 기라성 같은 영주들이 구축해 온 독과점 체제.
스스로 무너지지 않는 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던 4인방의 아성은 새 천년에 접어들면서 바닥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4인방끼리만 서로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구조 속에 난데없이 새로운 종(種)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스승 조훈현 9단과 유창혁 9단 외에는 누구에게도 타이틀을 내준 적이 없는 '돌부처'이창호 9단은 연초부터 '반상의 철녀'루이 나이웨이(芮乃偉) 9단에게 연전연패, 불길한 징조를 보이더니 급기야 '괴동'목진석 5단에게 KBS바둑왕 타이틀을 빼앗겼다.
4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천원전에선 '무명 반란의 주역' 유재형 4단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중도 탈락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루이 9단의 현란한 공격 바둑에 맥없이 무너지며 국수위를 탈취당한 조훈현은 올해부터 연승전 방식으로 바뀐 패왕전 하나에 간신히 몸을 의지하는 신세가 됐고, 유창혁과 서봉수는 신예들에게 각각 배달왕과 LG정유배를 넘겨주면서 국내 기전 무관(無冠) 상태로 전락했다.
이에 따라 국내 바둑계의 판도는 정상 4인방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사상 처음으로 6인이 타이틀을 나눠 갖는 춘추전국시대가 형성됐다.
군웅들의 영토는 이창호 9단이 3(기성, 명인, 왕위), '불패소년'이세돌 3단이 2(배달왕, 천원), 조훈현 9단 1(패왕), 루이 나이웨이 9단 1(국수), 최명훈 7단 1(LG정유배), 목진석 5단 1(KBS바둑왕) 등으로 크케 재편됐다.
올해 바둑계의 판도 변화는 상금 랭킹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32연승의 불패 신화에 빛나는 이세돌 3단과 남녀 통합 국수에 오른 루이 9단이 각각 1억원과 1억 1,200만원의 상금을 받으면서 억대 상금 진입자가 처음으로 5명으로 늘어났다.
이창호는 95년 3억 2,000만원으로 랭킹 1위에 올라선 이래 최악의 실적을 기록했고, 서봉수는 상금랭킹 집계 이래 두번째로 8위권으로 추락했다. 반면 국제 대회 성적이 좋았던 조훈현이 타이틀 보유자의 난립으로 3억 8,000만원대의 '적은 액수'로 94년 이후 6년 만에 1위를 탈환한 것이 이채롭다.
▲'부동의 1위'고수한 한국바둑
국제무대에서는 여전히 한국바둑의 기세가 등등했다. 출전 선수 전원이 초반 탈락의 수모를 겪은 제2회 중국 춘란배, 안방에서 우승컵을 중국에 내준 제4회 LG배 세계기왕전(준우승 유창혁 9단) 정도가 쓰라린 기억이지만 세계 무대에선 역시 '공한증(恐韓症)'의 위력이 대단했다.
한국은 4인방을 주축으로 한 호화진용으로 국가별 단체대항전인 제1회 농심신라면배의 우승컵을 안았고 제13회 일본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와 제12회 TV바둑아시아선수권대회(조훈현 9단), 제4회 한ㆍ중천원전(이창호 9단), 제5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선수권대회(유창혁 9단) 등을 잇따라 석권했다.
우승 상금만 4억원이 넘는 '바둑올림픽'제4회 잉씨배 결승에선 이창호가 '중국바둑 1인자' 창하오(常昊) 9단을 일찌감치 2대 0으로 따돌리고 있다. 최철한 3단과 목진석 5단 등 신예강호들이 초반부터 맹활약한 제2회 농심신라면배에선 한국팀의 우승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제 바둑계는 우리 바둑 내부의 세대교체의 에너지가 밖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올해 제13회 후지쓰배에서 당당히 3위에 입상한 목진석 5단이나 제5회 LG배 세계기왕전 준결승전에 오른 이세돌 3단은 충분히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변형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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