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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 사람] 이어령 새천년준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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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 사람] 이어령 새천년준비위원장

입력
2000.1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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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이 저물어간다. 신문사의 한 동료는 얼마 전 자신의 칼럼을 '뉴 밀레니엄 찬가(讚歌)가 어느새 만가(輓歌)로 바뀌었다'고 시작했다. 이 이상으로 올 한 해를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이 또 있을까.열 두 달 전, 2000년이라고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생각한 사람도 없었겠지만 지금 보고 느끼듯 이렇게까지 나빠질 거라고 생각해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올해 마지막 '정숭호가 만난 사람'은 이어령(李御寧ㆍ66) 새천년준비위원장이다. 새 세기의 첫 해를 맞아 민족과 나라가 새로 나아갈 길을 이모저모 궁리하고 준비했던 그였기에 허망하게 보내고 마는 2000년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아서 였다.

△ 2000년 마지막 주일을 맞은 심정이 어떠신지. 새 천년을 준비해 온 사람으로 올해를 넘기는 소감은 또 다를 것 같다.

"0자가 세 개 붙은 해를 다시 맞기 위해서는 앞으로 천년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도 하늘의 별들이 내려앉은 것 같은 열 두 달 전 광화문 거리의 장식등이 눈에 선하고 50만 시민들이 천년의 자정을 카운트 다운 하던 함성이 귀에 선하다. 0시 0.1초, 방송과 인터넷 전문가들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던 즈문동이 김태웅군의 탄생 현장을 리얼타임으로 온 국민에게 보여주고 그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낸 것은 더한 감격이었다. 어떤 불꽃이 그보다 더 아름답고 어떤 에어돔이 그보다 더 값지고 감동적이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희망과 감동이 사회분위기로 지속 발전하지 못하고 급랭한 데 대한 아쉬움도 크다."

그는 그 아쉬움을 이렇게 말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열린 새천년 첫날 행사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었다. 우리 민족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좋은 기회였다. 누구나 정월 초하루에 일년을 계획하듯 100년밖에 못사는 사람이 천년의 미래를 생각해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 기회가 사회적 에너지로, 사회자본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넘어가게 됐다."아쉬움이라기보다는 회한과 한탄이 섞여있는 토로였다.

△ 천년 맞이의 고조된 국민 분위기가 사회적 에너지로 이어지지 못한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새 천년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국민의 관심이 곧 바로 찾아온 국회 선거 등 현실적인 정치문제로 쏠리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서울 올림픽 성공의 무드가 청문회 등 당시의 정치쟁점으로 급랭한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새천년준비위원회로서도 선거를 앞두고 이벤트성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자칫하면 선거홍보에 이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지만 희망과 사랑의 꿈은 달걀처럼 깨지기 쉽지만 껍질을 깨는 그 아픔 없이는 새 생명과 창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한해동안 실망스러운 일들이 많았지만 남북공동성명과 이산가족의 만남 등, 지난 세기와는 다른 새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데서 위안을 찾는다. 비록 지금은 지탄을 받기도 하지만 올 한해 벤처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았던 것도 새 세기에 대한 희망의 징조다."

△ 기대와 희망이 금세 한탄과 절망으로 바뀐 것은 쉬 끓고 쉬 식는 냄비기질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냄비현상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특성이다. 어느 짐승에게 버블이 있고 유행이 있나. 쉬 끓고 쉬 식는 습관 때문에 미국의 골드 러쉬, 네델란드의 튜립 버블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나.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냄비현상이 아니라 냄비에 계속 불을 때어 끓이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도 선거 전후해서는 문화를 문명이나 제도로 바꾸기 위한 법 개정이라든가 프로그램 모델 개발 등 비전 사업 개발에 노력해왔다. 가슴으로 하는 새천년 준비(행사)와, 머리로 하는 천년의 준비(연구와 세미나)를 조화와 균형 있게 다루려고 했던 거다. 그 결과로 평화 환경 인간 지식 역사의 다섯 분야 총 61개의 사업 가운데 남북관계 등 여건이 허락하지 않은 3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끝낼 수 있었다. 우리 위원회에서 나온 20권의 리포트와 연구서 모두가 한국이라는 냄비를 계속 끓게 하는 제도적 장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 선생님께서는 연초 '21세기는 이종배합(異種配合)이 원칙인 융합의 사회가 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융합을 위해서는 관용(寬容)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장 이 사회가 관용이 넘치는 사회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참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될 것 같지도 않다. 어떻게 해야 사회 구석구석에 관용과, 그를 뒷받침할 덕(德) 인(仁) 정(情)이 넘칠 수 있을 거라고 보는지.

"관용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가치인데 시대 흐름은 반대로 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의 3대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가 혁명 직후 바로 실천되었던가? 금세 제정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나.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다. 아무리 몸부림 처도 극단론 전투론 호전론은 발을 못 붙인다. 프랑스 축구 대표팀을 보라. 6명이 이민자들이다. 관용이란 내 친척이 아닌 사람, 과거의 숙원이 있는 사람도 포용하고 융합하는 것이다. 팬더 곰이 왜 멸종위기인지 아는가. 죽순만 먹기 때문이다.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아 종 전체가 절멸위기에 놓인 것이다. 이제 순수주의로는 안 된다. 창조적 에너지는 다원성을 포용하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나라에는 현실적으로 관용이 모자란다. 원래는 그러지 않았는데 어느새 지연 학연 혈연이 아주 깊어졌다. 남을 인정해라. 한 손으로 해결하려 하지말고, 두 손으로 해결할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잠재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남북분단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도 민족이 힘을 모아 풀어가기로 한 이상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 '천년의 문'을 건립하자느니, 말자느니 말이 많은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원래 문화부와 서울시가 따로 새천년 기념조형물을 세우려던 것을 새천년준비위원회가 낭비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 하나로 통합하자는 기획안을 제시해 천년의 문 건립이 추진되었다. IMF 체제하에 낭비가 아니냐고 도 하지만 우리는 몽고병이 쳐들어왔을 때도 팔만 대장경 사업을 벌린 민족이다. 천년에 한번이라는 상징성, 월드컵구장이 들어설 난지도의 환경개선, 관광자원개발이라는 경제성, 현대사 박물관이라는 문화성 등을 감안한 다목적 복합건물을 지으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새천년준비위원회가 금년말 해체되므로 문화부 산하에 '천년의 문' 법인을 별도로 설립, 여론수렴과 설계 현상모집 등을 관장토록 하고 위원회는 예술가의 창의성과 전문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독립법인에 모든 것을 맡겨왔다. 지금은 우리 위원회와 아무 관련 없는 사업이 됐다. 짓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도 '천년의 문' 법인에서 이 달 말로 끝내도록 되어 있는 기술검토 재원조달 방안 등을 문화부가 정밀 검토하여 합리적으로 풀어갈 것이다."

그는 '천년의 문'건립이 새천년준비위원회와 지금은 관련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이건 꼭 써주셔야 하오. 그래야 역사에 기록이 남습니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새천년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고통이 있었다는 뜻일 게다. 냄비기질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도 "내가 벌여온 여러 이벤트를 일회성, 일회성이라고 하는데 밥 먹는 건 일회성이 아니오? 결혼식도 일회성이지. 일회성이 있어야 영속성이 있는 거요. 일회성이 쌓여야 평생성이 생기는 겁니다."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사회적 축제가 되풀이되어야 사회자본, 곧 문화가 된다는 말을 그렇게 이야기 한 것이다. 21세기 첫해의 잔치 차일을 너무 일찍 거두게 된데 대한 불만이었다. 잔치, 축제‥, 사회적 이벤트가 많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 기자도 동의한다. 사회적 이벤트는 곧 사회적 스킨십일 터이고, 깊은 스킨십이 깊은 동료애를 낳듯 사회적 스킨십이 깊어야만 공동체 의식이 깊은 뿌리를 내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편집국 부국장 soong@hk.co.kr 사진=원유헌기자

■"남들 술마실때 독서...공적생활 올해로 끝"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치밀한 논리와, 그 논리들이 또 한 번 교직해서 이뤄지는 광대한 '말'이다. '동서고금에 막히는 것이 없도다'는 고전적 표현이 그 외에 또 어울릴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인터넷 혹은 IT, DNA에 대한 최첨단 지식도 전문가 수준에 이르렀으니 더 말할 것이 없다.

"내 지식이 폭 넓은 것은 첫째 술을 안 먹기 때문이다. 남이 술 먹는 시간에 나는 창조적인 일을 해왔다. 술 마시는 게 반드시 노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 시간을 활용한다. 저녁 6시 이후에는 누구와도 약속을 하지 않는다. 6 세 때부터 해온 독서는 내 생명이다.

독서를 통해 끊임없이 새 정보를 얻는다. 요즘엔 인터넷을 통해서도 정보를 얻는다.

누구나 독서를 하지만 나는 요령이 있다. 어디에 밑줄을 쳐야 하는 가를 안다. 그러다 보니 관계 없는 책들을 읽어도 엮을 줄 안다. 말로 읽어도 되로 밖에 못 내놓는 사람이 있지만, 되로 읽고 말로 내놓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읽으면서 이책 저책을 꿰어 놓는다. 그대로 옮기면 표절이지만 내가 새롭게 엮는 건 창조행위다. 여태 몇 권이나 읽었냐고? 서문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만 읽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집과 연구실에 수만 권의 책이 있지만 거의 한 번은 내 눈길을 거친 것들이다. 정독은 하지 않았어도 대부분의 책이 무슨 내용인지는 알고 있다는 말이다.

"IQ를 재본 적이 있느냐"고 한 번 물어보았다.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을 연결하는 능력, 상상력을 바탕으로 제 3의 것을 만드는 창조력이 남보다 뛰어나기는 할 것이다. 물론 암기력도 나쁘지는 않다. 얼마 전만 해도 무슨 책 몇 페이지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가 훤했다. 요즘엔 그 정도까지는 안된다."

그는 내년부터는 대학교수도 그만두고 외국여행과 집필, 독서시간을 늘리면서 쉬겠다고 말했다. "공적인 생활은 금년으로 끝이다. 여태 쓴 것, 읽을 것을 다 정리해 내 삶의 끝마무리를 할 계획이다. 문화부장관과 새천년준비위원장 등 공직을 두 번 했는데 개성이 강해 상처를 많이 입었다. 그러면 밤잠을 못 이뤘다. 그 스트레스가 내 창조력을 얼마나 마모 했나. 이제는 내 일만이라도 제대로 해봐야 겠다. 이게 일흔 가까이 살면서 얻은 교훈이다. 세계를 바꾸려면 나를 바꾸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걸 요즘 다시 깨닫고 있다. 2000년을 보내면서 자꾸 생각하게 되는 말이다.

■ 약력

충남 온양 출생 1934년

서울 문리대ㆍ동 대학원 졸업

문학평론가로 등단 1956

서울신문 논설위원 1960(이후 한국일보 중앙일보 조선일보 논설위원 역임)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식전행사와 문화행사 주도 1988

초대 문화부 장관 1990

새천년준비위원장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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