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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 '눈내리는 저녁 숲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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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당 / '눈내리는 저녁 숲가'

입력
2000.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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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프로스트(1875-1963)의 시 중에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서서'가 있다.세모(歲暮)에 즈음해서 이 시를 읽으면 한결 평화롭고 그윽하다.

로 시작되는 이 시는 저녁 풍경과 설경을 중첩시키면서 적요하고도 낭만적인 겨울 정서를 전해 준다.

프로스트는 미국 뉴잉글랜드 시골에 묻혀 살며 시를 써 네 번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세모를 더 연상시키는 대목은 마지막 연의 '약속'이라는 말일 듯하다.

어느 대학 총장이 1997년초 한 여고생으로부터 연하장을 받았다.

라는 글이 쓰인 연하장이었다.

그 여고생은 총장이 후원자로 있는 보육원의 학생인데, 곧 졸업하고 정든 곳을 떠나 자립해야 했다. 총장은 무심했던 자신을 책망하면서 복지시설을 찾았다.

여학생을 만나 "졸업 후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명랑하던 학생의 얼굴이 금세 수심에 잠겼다. 보육원장은 "아이들의 제일 큰 소원은 어느 가정에 입적이 되어 자신의 과거를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순간, 총장의 머리에는 그들의 절실한 바람이 찡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 선우중호 총장이었다.

1년 반이 지난 뒤 선우 총장은 느닷없는 딸 고액과외 사건에 휘말렸다. 학생들은 '고액 쪽집게 과외가 교육개혁입니까?'라며 농성을 벌였다.

총장은 변명을 하지 않고 학교를 떠났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침묵함으로써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일간스포츠는 또 다른 진실을 보도하고 있었다.

또 파킨슨씨 병을 앓고 있는 부인은 '다른 어머니에 비해 딸에 관심을 쏟지 못하고 과외도 안 시켜 이런 것이 아닌가'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선우 총장은 딸들의 장래를 걱정해 입양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몹시 꺼린 것으로 알려졌다.>

선우 총장은 보육원의 여고생을 만나본 후 둘째 딸의 처지를 더 깊이 걱정했을 듯하다. 그는 98년 학교를 떠났다가 최근 명지대 총장으로 교직에 복귀했다.

그의 교직복귀를 반가워 하면서, 가족애와 원칙의 문제 등을 다시 생각해 본다. 가족애와 원칙이라는 가치가 서로 충돌할 때, 언론이 어느 편에 비중을 두고 보도할 것인가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혈연을 중시하는 폐쇄적인 우리 사회에서 타인을 가족으로 맞아 사랑을 베푸는 것도 고결한 성품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천주교 주교회의의 과거 반성에 이어, 한국종교협의회도 '새천년 종교인 윤리헌장'을 발표하며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공동의 이상과 가치 추구'를 선언했다.

이를 종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휴머니즘에 바탕을 둔, 인간의 얼굴을 한 정의(正義)'라는 일반론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할 것이다.

세모가 되어 선우 총장의 딸사랑을 새삼 떠올리거나 서울 명동의 자선냄비에 고액 지폐 다발을 넣고 사라지는 '얼굴 없는 천사들'의 선행에 흐믓해 하는 것은, 사람들 가슴에서 휴머니즘의 온기가 식지 않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박래부 편집국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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