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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13)유라시아 세계를 통합한 몽골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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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 /(13)유라시아 세계를 통합한 몽골제국

입력
2000.1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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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6년 7월.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서는 새로운 군주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준비가 한창이었다.세계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몽골의 귀족과 장군들이 속속 도착했고, 제국의 지배를 받아들인 속국의 군주들 역시 하나 둘 씩 모이기 시작했다.

이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하나 도착했다. 그는 프란체스코파 수도회에 속하는 카르피니라는 신부로서, 로마교황 인노센트 4세의 사신으로 온 것이었다.

목적은 대칸을 만나 유럽에 대한 장래 계획, 즉 혹시 침략을 할 의도가 있는 지 없는 지를 알아보고, 가능하다면 그를 기독교로 개종시켜 십자군 전쟁에서 그 도움을 받을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수도사 카르피니는 대칸의 즉위식에 참석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대칸을 만나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대신 그는 대칸이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받아서 귀로에 오를 수 밖에 없었고, 돌아온 뒤 그는 자신의 방문을 소상하게 기록한 글을 적어 교황에게 보고했다. 그것이 몽골인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그가 받아온 편지의 라틴어 번역본이 실려 있어 당시 몽골의 대칸이 교황에게 어떤 내용의 전갈을 보냈는지를 알 수 있었지만, 이 편지의 원본은 소재불명인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차대전이 끝난 뒤 로마 교황청에 부속된 비밀문서고에서 우연히 이 편지가 발견되었고, 그 사진과 내용이 소개, 연구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편지는 교황청이 소유한 자료 가운데에서도 특히 오래된 것이어서 일반에게는 결코 용이하게 공개되지 않는 문건이다.

따라서 역사에세이팀은 이를 열람하기 위해 사전에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관측에 협조요청을 해놓았다. 로마에 도착한 직후, 배양일 대사는 우리 일행을 차에 태우고 교황청 비밀문서고로 직행했다.

담당자들과의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우리는 조그만 접견실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흰 가운을 입고 면장갑을 낀 문서관리인이 나타나더니 우리에게 문제의 편지를 펼쳐보여 주었다.

페르시아어로 쓰인 이 편지에서 몽골의 군주는 교황과 서구의 군주들에게 즉시 자신에게로 와서 무릎을 꿇고 조아리라고 촉구하고 있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신만이 아신다'고 경고하고 있다.

지금도 편지의 하단에는 "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대몽골제국의 바다와 같은 군주의 칙령. 복종하지 않는 백성들이여, 이를 경외하라!"는 내용이 새겨진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편지를 쓴 장본인은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몽골제국의 제3대 군주였던 구육이라는 사람이었다.

테무진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를 통일하고 '칭기즈칸'을 칭한 것이 1206년의 일이니, 이 편지는 그로부터 꼭 40년 뒤에 쓰여진 셈이다.

이 40년 동안 칭기즈칸과 그의 후계자들은 북중국을 침공하여 금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반도를 초토화시켰을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중동으로 원정군을 보내 수많은 도시를 파괴하고 그 주민을 학살했다. 바투가 이끄는 10만명 이상의 병력은 러시아를 거쳐 헝가리와 폴랜드로 들어가 유럽의 중무장 기병들을 괴멸시켜 버렸다.

이처럼 수많은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몽골의 기마군단은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군대였다. 이들을 직접 관찰한 수도사 카르피니는 신속한 기동력, 엄격한 군율, 다양한 전술과 무기를 승리의 요인으로 꼽았다.

몽골인들의 세계정복전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중동으로 파견된 군대는 이란을 거쳐 바그다드로 들어가 압바스조를 무너뜨림으로써 서아시아를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중국으로 내려간 몽골인들은 바다와 같은 양자강을 방패막이로 끈질기게 항전하던 남송을 넘어뜨리고 말았다.

남송의 해군을 접수한 몽골제국은 이제 해상으로의 진출까지 시도했다. 비록 일본원정은 태풍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시 그들은 3,500척의 선박에 10만명을 태우고 출정할 정도의 해군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미개하고 가난하며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던 민족이 어떻게 해서 무한한 자원을 갖고 있던 강력한 문명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는가?'. 한 학자의 이러한 의문처럼 몽골제국 출현은 세계 역사상 하나의 경이로운 현상이다.

일개 유목부족으로 출발한 그들이 거대한 기마군단을 앞세워 농경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마지막에는 해양까지 장악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당시 그들의 출현과 정복전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덕적 타락을 징벌하기 위해 신이 보낸 채찍이거나, 아니면 사탄의 저주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고, 그래서 '몽골'이라는 말 대신 지옥을 뜻하는 라틴어 '타르타르(Tartar)'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자들은 몽골제국의 성공의 근본적인 요인을 유목민의 탁월한 기마전술에서 찾기도 하고, 혹은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던 당시의 정치정세에서 찾기도 한다.

모두 근거가 있는 주장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몽골제국과 같은 지구적인 규모의 거대한 정치조직이 단순히 '무력'과 '정복'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유지될 수는 도저히 없다는 점이다.

몽골제국이란 결국 몽골인들을 핵심으로 하는 거대한 하나의 통합력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3세기 몽골인들이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성취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통합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통합력은 단지 몽골인들만의 내적인 결속이 아니라 비몽골인들까지 끌어들이고 제국의 일원으로 만드는 힘인 것이다.

그러면 몽골인들은 어떻게 그같은 통합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다른 어느 민족도 갖지 못한 독특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시대적인 요구, 즉 그들에게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 역사적인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9세기 중반 이후 몽골제국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년 동안 세계사는 미증유의 분열기를 경험한다. 동아시아도 금나라와 남송 그리고 서하로 나뉘어서 서로 대립했고, 서아시아는 압바스조의 약화로 각지에서 지방정권들이 발호했다. 또한 유럽도 왕권과 교황권이 대립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한다.

이같은 정치적 혼란은 유라시아 전역의 교통과 상품유통을 교란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국제교역은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국제상인들은 이러한 혼란을 넘어선 안정과 통합의 시대를 희구하게 되었고, 그들이 몽골제국의 등장을 누구보다도 환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초기에는 몽골제국의 사신으로 혹은 원정군의 향도로 커다란 기여를 했고, 제국이 확립된 뒤에는 재정분야의 전문가로 활약을 하게 된다.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고 새로운 통합과 안정을 지향하는 시대적 분위기와 몽골인들의 내재적인 능력이 결합되면서 놀라운 통합력이 분출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그들은 고립된 여러 지역들을 연결짓고 통합한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답사팀,바티칸 몽골문서 분류번호 바로잡아줘

김호동교수는 바티칸 방문에서 비밀문서고의 잘못된 문서분류를 바로잡아 주었다.

답사팀이 본 문서는 구육의 서한을 비롯한 4통으로 몽골 일한국의 군주 아바카가 '교황 사신이 방문하면 환대하겠다'며 토끼해(1267년 또는 1279년)에 보낸 칙령서, 아바카의 아들 아르군이 교황청에 우호와 연합을 제의하며 호랑이해(1290)에 보낸 서신, 아르군의 아들 가잔이 교황 보니파키우스 3세에게 이집트를 함께 공격하자며 호랑이해(1302년)에 보낸 편지 등이다.

이들 서한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세계중앙아시아학회 부회장인 김교수조차 처음 열람한다고 했다.

그런데 감탄사를 연발하던 김교수는 문서들을 자세히 보더니 "어, 이것들 잘못됐어"라고 말했다. 구육의 서한을 제외한 편지 세 통은 연도순으로 1801-1, 1801-2, 1801- 3의 번호가 붙어 있는데 아르군의 편지와 가잔의 편지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김교수가 몽골어로 된 서한의 내용을 영어로 자세히 설명해주자 비밀문서고 관계자들은 머쓱해하면서 고맙다는 뜻을 표시했다.

몽골어는 물론 페르시아어 투르크어 중국어 등 10개 언어를 익힌 김교수의 탁월한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김호동 교수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나오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중국사학자 페어뱅크의 지도 아래 박사 학위를 딴 국내 중앙아시아사의 독보적 존재이다.

지금 이 연재물도 하바드대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쓰고 있다. 글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신속한 기동력, 엄격한 군율, 다양한 전술과 무기로 유라시아의 문명국들을 정복한 몽골. 그 배경에는 안정과 통합을 바라는 시대적 욕구가 있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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