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업체인 안철수 연구소는 최근 안티바이러스 및 암호화 기술 개발을 위해 전문 엔지니어 20여명을 선발한다는 공고를 했다. 현재 운용중인 기술인력의 50% 이상을 늘리는 셈이다.내년 회사 매출의 15%를 연구개발(R&D)비로 책정한 안철수(安哲秀) 사장은 "일본에 50만 달러 수출에 이어 내년 미국 중국 등 세계 시장 공략을 위해 기술진 대폭 확충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올 상반기에 알렉사닷컴 순위 세계 100위 권을 내세우며 적지 않은 자금을 유치했던 인근의 한 포털 업체는 경영난으로 사이트 필수 운영요원 등이 대거 퇴사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서비스에 곤란을 겪고 있다.
'닷컴빙하기'를 맞고 있는 벤처 업계에 특정 기업군을 축으로 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 변혁의 중심에는 '핵심(Core)기술' 을 보유한 기업들이 서 있다. 핵심기술을 지닌 벤처 기업들은 침체기에 오히려 R&D 투자를 확대하고 전문 인력을 스카우트해 타사와의 격차를 벌려 나가고 있다. 테헤란 밸리의 한 소프트웨어 업체 사무실에 걸린 '기술보국'(技術
輔國)' 표어가 상징하듯, '머니 게임'에만 한눈을 팔던 벤처들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금시장은 물론, 벤처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른 M&A(인수합병)시장에서도 관건은 기술력이다. 벤처지주회사인 L사 관계자는 "무선통신 핵심 기술을 갖춘 기업의 인수가 지상 목표"라며 "기술력만 갖췄다면 돈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라호야인베스트먼트 김상훈(金尙勳) 이사도 "원천기술을 지니면 최상급, 적어도 1년 내에 신제품 생산이 가능한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면 상급 매물로 분류되는 것이 최근 M&A시장 동향"이라고 말했다.
아이디어 수준의 비즈니스모델(BM)만이 춤추던 특허시장에서도 기술 기업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다. 비즈니스모델 출원이 점차 줄어든 반면 벤처 기업의 기술출원은 늘어나는 추세다.
올해 코스닥 등록 벤처기업의 특허출원 및 등록 건수를 보면 '벤처호황기'였던 올해 1~8월 월 평균 7건이던 것이 9~11월에는 평균 15건으로 오히려 두 배 이상 늘었다. 김&장법률사무소 백만기(白萬基) 변리사는 "1990년대 초기 벤처들의 기술이 수입대체 수준이었던 데 비해 요즘에는 세계 시장에 내놔도 손색없는 기술이 많다"며 기술의 질(質)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기반기술 부족으로 솔루션 등 '가벼운' 분야에만 매달리는 현상과 네트워크 장비 등 거대 시장을 휩쓸 수 있는 기술이 취약하다는 점은 한국 벤처가 풀어야 할 과제다.
한글과컴퓨터 전하진(田夏鎭) 사장은 "80년대 말 열악한 환경에서도 PC 한대로 아래한글 등 소프트웨어 신화를 이룬 것이 우리 벤처의 저력"이라며 "기술이 벤처의 전부라는 분위기가 확산되면 조만간 세계 시장의 벽을 넘는 기술 벤처가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탄탄한 기술력 수출 120%늘어
올해 초보다 좋은 조건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하거나 인력 확충 등을 통해 공격 경영을 펼치는 벤처기업들의 공통점은 그동안 펀딩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기술 한우물'을 파왔다는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생벤처 1호인 에스엘투(SL2)는 7일 폐막된 한민족글로벌 벤처네트워크대회(INKE)에서 재외 한국계 벤처스타들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끌었다.
SL2는 업계 최고 수준인 10만 단어의 음성을 인식, 합성해내는 음성인식 알고리즘을 자체 개발한 6월부터 국내외 투자사들로부터 뜨거운 '러브콜'을 받아왔다. 하지만 전화성(全和成ㆍ25) 사장은 "펀딩은 잘 알지도 못하고 기술 개발과 무관한 자금을 유치할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며 대규모 투자 제의를 거절했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마케팅 능력에서 앞선 외국 대형업체와 경쟁, 삼성증권 콜센터 사업권을 따낸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이 배경이 됐다. 전사장은 "음성인식 기술 하나만은 세계 어느 업체와 경쟁해도 지지 않을 각오로 개발에 전념하겠다"고 다짐했다.
최초의 한일 번역 소프트웨어인 '바벨'로 유명한 유니소프트(대표 조용범ㆍ趙容範)는 12일 세계적 기업인 일본 소니사로부터 자본금의 25배수로 3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소니가 한국 벤처기업에 투자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 소니는 유니소프트의 자연어 처리기술을 높게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사장은 "사업초기부터 일본 시장에서 기술력을 집중 부각시켜 충분한 검증을 받았다"며 "투자받은 돈 대부분을 포항공대와 공동 설립하는 국내 최대의 자연언어처리 연구소 등 기술 개발에 재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보통신부가 최근 IT(정보통신)분야 중소 벤처 100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올해 수출예상액은 지난해보다 120% 이상 늘어난 2조3,670억원에 이른다. 이러한 증가세에는 벤처 붐을 이끌었던 1세대 중견 벤처기업들이 R&D 능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 공략에 나선 것이 큰 역할을 했다. 버추얼텍(대표 서지현ㆍ徐志賢)과 핸디소프트(대표 안영경ㆍ安英景) 등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미국 시장에서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경우다.
버추얼텍은 무선인트라넷 분야에서 미 나스닥 상장업체들을 제치고 납품을 따냈고, 핸디소프트는 존슨앤존슨 등 대기업은 물론 미 상무부에도 인트라넷 소프트웨어를 공급해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IT 이외 분야에서도 벤처기업의 기술 수출은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서울벤처타운 출신의 리닉스(대표 이승주ㆍ李承宙)는 스팀흡입청소기를 개발, 프랑스에 연간 200억원의 수출계약을 맺는 한편 남부 바르주에 한국비즈니스센터를 세워 인근 도로의 명칭을 '서울로'로 바꿨다.
의학기기 벤처 지인텍(대표 서정주ㆍ徐廷柱)은 자체개발한 속눈썹 성형기로 18개국의 특허를 받고 일본 등에서 1,1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데 이어 비염치료기인 '코크린'을 개발, 유럽에 4,000만 달러어치를 수출했다.
전문가들은 "국내 업체들이 노하우를 갖고 있는 무선인터넷 장비 및 솔루션 분야, 생체인식 분야, 그룹웨어 분야 등에 역량을 집중하는 한편 외국 틈새시장을 노릴 수 있는 전문 기술을 개발하는 벤처 스타들을 많이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상연기자
kubrick@hk.co.kr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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