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파 '내가 죽은이유'"내가 누굴 죽였는지 몰랐듯, 내가 죽은 이유도 모른 채 구천을 떠돌다 나는 다시 태어났다. 다시 그 전쟁터였다. 그렇게 몇 겹의 생애가 하루처럼 흘렀다."살륙의 현장에서 살아남아 혼령으로 떠도는 사내가 내뱉는다.
세상살이란 결국 그런 것 아니냐는, 악의적인 체념마저 느껴진다.
극단 창파의 '내가 죽은 이유'는 인간사에 자욱하게 살포돼 있는 죽음들을 과거-현재-구천을 넘나들며 보여주는 무대다. 못다 죽어 미명을 떠도는 미명귀의 과거는 어둡고, 그들이 견뎌내야 할 미래는 끝날 기약 없이 냉혹하기만 하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왜 죽어가야 하는지를 그린 이 연극은 역사와 미래의 자기 변명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당신을 떠나 있는 것보다, 전쟁 속에서 당신 곁에 있는 게 훨씬 행복해요."여자의 간절한 목소리다. 그러나 전장의 악다구니속에서 결국 남자는 죽는다. 소녀의 손가락이 하나씩 없어지는 것으로 상징되던 전쟁의 폭력성은, 전시가 아니더라도 고문의 현장으로 여전히 계속된다.
이 연극은 전쟁을 꿈꾸는 무리와 평화를 갈망하는 집단 간의 영원한 대립으로 귀결된다.
순수한 사랑은 '당국의 이성적 질서 유지에 위배되는 감정의 교란 상태'로 낙인 찍혀 살인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2세를 키우며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몫, 사랑을 어디선가는 계속 이어간다.
극은 21세기말의 인물인 인격관리국 직원을 통해 SF적 분위기로 나아간다. 다중인격적 정신분열증이 전염병처럼 확산되자, 엉뚱하게도 눈물샘을 복원해내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테크노크라트다. 그렇게 해서 인간적 감정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식을 들춰내 그들이 의도한대로 인간을 조작해내려는 집단이다.
이 디스토피아의 연극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촉발됐다. 당시 극단 대표 채승훈씨에게는 시신을 끝내 찾지 못한 유족들의 절망에 대해 연극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지가 문제로 다가왔다. 사고 직후인 97년 2월 이화여대 국문과 정우숙 교수와 나눴던 '미명귀(未明鬼)' 이야기가 3년을 곰삭아 이 작품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명귀란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헤매는 혼백을 가리키는 말이다.
'흉가에 볕들어라' '악몽' 등 최근 들어 초자연적(occult) 심령 현상을 다룬 연극을 잇달아 상연, 객석을 가득 채웠던 바탕골소극장이 2001년 1월 7일까지 그 악명(?)을 다시 한번 즐기고 있다. 박지일 권남희 서정연 등 출연. 화~목 오후 7시 30분, 금ㆍ토 오후 4시 30분 7시 30분, 일 오후 3시 6시. (02)744-8025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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