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견(安堅) '고잔도장축도'(古棧圖長軸圖)의 등장은 안견의 진품은 일본에 있는 몽유도원도 뿐 국내에는 없다는 학계의 통설을 뒤집는 것이다.문화재위원인 허영환 성신여대 교수나 재야 미술사학자 이건환씨는 안견의 낙관, 세종대왕이 당 현종의 피난 고사를 그리게 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 그림에 붙어 있는 조선 초기 문신 이예(李芮?419~1480)와 윤자운(尹子雲?416~1478)의 제발(題跋) 등으로 보아 진품이 틀림 없다고 판단한다.
이건환씨는 그림 자체를 보더라도, 고잔도장축도에 나타난 화풍이 조선 중기 문인화가인 윤두서(尹斗緖ㆍ1668~1715)가 서화 감상기 '기졸'(記拙)에서 밝힌 안견의 화풍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넓으면서도 텅 비지 아니하고, 굳세면서도 튼튼하지 아니하고, 산에는 기복이 없고 나무에는 배면(背面)이 적다. 그러나 그 고아한 모습은 쓸쓸한 수풀 속 작은 마을, 낡은 집, 위태로운 다리와 같다.
바늘을 모아 놓은 듯한 나뭇가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듯한 돌의 준법 등은 숲이 우거진 듯 하고 어둑어둑한 듯 하여 저절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낙관을 보자. 고잔도장축도의 그림 첫머리에는 '지곡'(池谷)과 '안씨득수'(安氏得守)라고 새겨진 낙관 2과가 찍혀 있다. 이는 서화의 낙관모음집인 19세기 중엽 일본 문헌 '고화비고'(古畵備考)에 채록된 안견의 낙관과 일치한다. '지곡'은 안견의 본관이자 호이며 '득수'는 안견의 25세 전 초년 이름이다. '지곡'은 고잔도장축도의 그림 끝에도 찍혀있다.
세종실록 권 93에 따르면, 세종 23년(1441년) 9월 30일 세종은 당 현종이 애첩 양귀비에 빠져 정치를 그르치다 안록산의 난을 당해 피난 간 옛일을 거론하면서, 이는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이 마땅히 깊이 경계할 바가 있으니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그 사실을 기록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번에 공개된 고잔도장축도가 1441년에 그려진 것으로 파악하는 근거가 되는 기록이다.
이예와 윤자운의 제발은 각각 '안견의 그림'이라고 분명히 밝히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세종 조 집현전의 대학자인 두 사람은 몽유도원도에 제발을 남긴 21명에도 들어있는데, 몽유도원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고잔도장축도에도 칠언절구로 제발을 쓰고 있다.
특히 두루마리 표지의 '안견고잔도장축도'라는 제목 아래 찍힌 낙관 '양기신외유위(養其身外有爲: 스스로 몸을 수양하고 이를 밖으로 실천한다는 뜻)는 이예의 제발 첫머리 인장과 동일한 것으로, 끝 글자 '위'는 지금은 쓰이지 않는 고체 전서로 새겨져있다.
이 인장을 검토한 정충락 (한국전각협회 상무이사), 정무연(한국고미술협회 감정위원)씨는 이 글자가 옛날 자전에만 나오는 것으로 실물 도장은 처음 본다고 말하고 있어 이 그림이 아주 오래 된 것임을 방증하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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