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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 새로 써야할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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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 새로 써야할 걸작

입력
2000.1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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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 '고잔도장측도' 발견미술사학자 이건환(李鍵煥)씨의 표현에 따르면 안견(安堅) '고잔도장축도(古棧道長軸圖)'의 발견은 한국미술사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사건이다.

학계의 통설은 안견의 진품은 일본 천리대도서관에 소장된 몽유도원도 뿐이기 때문이다. 국내에는 진품이 없다는 얘기다.

국립중앙박물관의 18점 등 20여 점이 국내에 남아있으나 '전(傳) 안견'즉 안견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으로만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고잔도장축도는 미술사학계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킬 불씨이며, 진품으로 최종 감정될 경우 안견론과 미술사를 새로 쓸 수 밖에 없다.

문화재위원인 허영환 성신여대 교수는 "이번 고잔도장축도 공개를 계기로 지금까지 논쟁이 되고 있는 안견 작품 전부를 재검토해서 명확하게 진위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허 교수의 안내를 따라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로 25.5Cm 가로 219Cm 안에 여백이 거의 없을 만큼 세필로 그림이 꽉 차 있다.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755년)을 당해 험한 산길을 거쳐 촉(蜀ㆍ지금의 쓰촨성지방) 땅으로 피난가는 모습이 기암괴석과 인물ㆍ말ㆍ산천 등과 함께 가득 펼쳐져 있다.

그림은 황제보다 앞서 가면서 길을 살피고 고치는 선발대의 모습, 잠시 쉬고 음식을 준비하는 대원의 모습, 안심하고 따라가는 주인공 황제의 모습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있다.

그림이 시작하는 오른쪽 첫 부분 위에 안견의 낙관이 있고 그 아래 왼쪽으로 살짝 비껴난 곳에 나귀를 탄 평복 차림의 황제와 앞서 가는 사람이 보인다.

왼쪽으로 50Cm 쯤에는 여러 채의 가옥과 식사를 준비하는 많은 사람이 있고 그 주변에는 나무와 기암괴석, 너른 바위, 짧은 선을 수직으로 그어 그린 산등성이의 숲 등이 가득하다.

이 그림의 제목이 비롯된 '잔도'(棧道), 즉 사닥다리 길은 그림의 중간 부분인 왼쪽에서 1m 쯤 되는 곳에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서 왼쪽으로 30Cm 쯤 더 가면 커다란 동굴이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춥고 지친 표정의 인물 예닐곱이 보인다.

왼쪽으로 전체의 3분의 1쯤 되는 부분은 험한 산비탈길, 계곡에 위험스럽게 걸쳐진 구름다리, 계곡 위에 지붕을 씌우고 놓은 사다리 길 등이 그려져 있고 그 위로 나귀를 탄 사람들이 조심스레 건너간다. 그림의 왼쪽 끝에는 크고 잘 생긴 소나무 서너 그루가 있고 그 위에는 관문과 문루가 그려져 있다.

애첩 양귀비에 빠져 정치를 잘못하다 난리를 당해 피난하는 당 현종의 고사는 당 이후 중국과 한국에서 시나 그림의 주제로 많이 등장한다. 현종의 잘못을 시와 그림에 담아 후세를 경계하는 거울로 삼았던 것이다.

촉도(蜀圖)ㆍ촉잔도(蜀棧圖)ㆍ촉잔도도(蜀棧道圖)ㆍ고잔도도(古棧道圖)ㆍ행촉도(幸蜀圖) 등으로 불리는 이런 그림은 중국에는 진본, 방본(倣本:비슷하게 그린 것), 모본(模本:크기 화법 구도까지 진본과 똑같이 그린 것) 등이 많다.

한국에도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ㆍ1707~1769)의 '무자중추방사이당촉잔'(戊子仲秋倣寫李唐蜀棧, 견본담채, 58*818Cm, 간송미술관 소장)이 있다.

이번에 공개된 안견의 고잔도장축도는 허 교수가 세종실록 기록으로 추정한 바에 따르면 1441년 9월 또는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려졌다. 이예가 제발을 쓴 1458년까지는 10여년의 공백이 있다.

그 동안 어디에 있던 것일까. 미술사학자 이건환씨는 이 그림의 말미에 '청향각감장인'(靑響閣鑑臟印:청향각 소장이란 뜻)이란 도장이 찍혀있고, 민간가옥에는 각(閣)이라는 낱말을 쓰지 않던 당시 관례로 보아 궁중에 보관돼 있었던 것으로 짐작했다.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이 이예의 손으로 들어갔고, 오늘까지 전해진 것이다.

고미술품 소장가 이원기씨는 7~8년 전부터 안견 '고잔도장축도'의 존재를 알고 있다가 지난 10월 한 개인소장가로부터 이를 구입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씨는 1950년대부터 고미술품을 수집해왔으며 자비로 월간 '문화재'를 1971~83년 통권 115호까지 발행하기도 했다. 9월 초 공개되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원군 이하응의 대규모 묵란도첩도 그의 소장품이다.

●안견은 누구인가 조선초 최고 산수화가

안견(安堅 1401 또는 1418~1456 또는 1468)은 조선 초기 궁중화가다.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ㆍ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ㆍ주경(朱耕)이다.

조선 초 문예부흥기인 세종 연간부터 문종, 단종, 세조의 4대에 걸쳐 화원(직업화가)으로 활약했다. 특히 세종의 아들로 당시의 풍류객이며 열렬한 문예 후원자였던 안평대군과 가까워 그가 살았던 세종과 문종 때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산수ㆍ인물ㆍ말 그림 등에 두루 능했다. 북송대 화가 곽희(郭熙)의 영향을 받은 그의 화풍은 그가 살았던 1440년대부터 조선 중기인 1640년대까지 200년간 지속됐다.

작품은 미술사학자 안휘준 교수(서울대 )가 옛 기록으로 파악해 작성한 목록에 따르면 58점이나, 이번에 공개된 고잔도장축도(古棧道長軸圖)는 빠져 있다.

1442년작 비해당25세진(匪해堂二十五歲眞)으로 시작하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일본 텐리대도서관 소장), 안견 자신이 필생의 역작으로 꼽았던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적벽도(赤壁圖), 팔준도(八駿圖) 등이 있다.

학문과 서화에 두루 뛰어났던 김종직(金宗直ㆍ1431~1492)은 고려의 이녕(李寧)과 더불어 안견을 최고의 산수화가로 평가한 글을 남기고 있다.

안견 당대의 박팽년(朴彭年ㆍ1417~1456)도 몽유도원도에 남긴 제발에서 "그 높은 물결이 일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형상이나 연운이 호탕하고 아득한 자태는 가히 입신을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其高浪崩厓之狀, 烟雲浩▲행나무 목 아래 날 일)之態, 可謂入神矣)고 말하고 있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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