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 시상식 참석을 위해 출국하기에 앞서 당직을 맡고 있는 동교동계 인사들에게 크게 역정을 냈다고 한다.정동영 최고위원이 그런 얘기(권노갑 최고위원 퇴진요구)를 하도록까지 무엇을 했고 당내 초ㆍ재선 의원들이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를 만큼 당내의 기류에 깜깜했느냐는 질책이었다.
김 대통령은 정권 초기부터 동교동계 사람들을 당의 핵심 포스트에 전진배치시켜 당을 운영해왔다. 한 때는 근신 중이던 어느 의원만 빼고 동교동 가신 출신의원 모두가 당직을 맡기도 했다.
동교동계가 다 해먹느냐는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김 대통령이 동교동계를 당직에 전진배치한 것은 그들의 충성심과 헌신성으로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돌파하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실세그룹이 전면에 나서 책임 있게 정국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논리가 뒷받침됐다.
3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당과 국정을 이끌어 온 동교동계 리더십에 대해 당 안팎에서 심각한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동교동계가 위기상황 대처에 무기력하고 종종 위기의 진원지가 됐으며 지역편중 인사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당사자들의 강력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부패의 이미지까지 덧씌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민주당내에서 파문을 일으킨 동교동계 2선 퇴진론은 이같은 기류와 무관하지 않다.
김 대통령이 국정쇄신 단행을 공언한 마당에서 발생한 경찰고위직 인사파동은 동교동계의 상황관리 능력을 한층 더 의심케 한 사건이었다.
동교동계 인사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해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순박하고 능력도 남 못지않다.
최근 동교동계를 둘러싸고 일어나고 있는 잡음들이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그룹의 생리에서 비롯되지 않느냐는 시사다.
어느 조직이나 권력자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소수가 존재하면 다수의 나머지는 소외돼 뒷전에서 냉소하기 쉽다. 조직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틀이 망가지는 것이다.
소수의 핵심그룹이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끊임 없이 폐쇄된 울타리를 허물고 다수와 몸을 섞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얼마전 동교동계 인사들이 '권노갑퇴진론' 파문 속에 모임을 갖고 단합을 결의한 것은 방향착오였다.
당내에서 '그들만의 단합대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합의 과시가 아니라 동교동계라는 색채를 더욱 희미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당과 김 대통령 주변에서 위기극복의 새로운 리더십이 형성될 수 있는 환경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이 믿었던 동교동계가 기대 만큼 못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역정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동교동계 중심으로 위기를 돌파하려했던 김 대통령의 판단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뿐만 아니라 국정의 중요 포스트에 믿을 수 있는 내사람을 앉혀야 한다는 발상이 지역편중 시비를 불렀고 총체적 국정위기의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음은 부인키 어렵다.
김 대통령이 연말에 단행키로 한 국정쇄신 조치에서 인적 쇄신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김 대통령은 '믿을 수 있는 내사람' 이 아닌 인재등용의 새로운 컨셉을 선보이는 '첫번째 물방울'을 떨어뜨릴 수 있을까.
이재성 정치부차장
wkslee@hk.co.kr
입력시간 2000/12/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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