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집을 정리하다 당시 중학교 1년생인 딸이 낙서처럼 써 놓은 유서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내용은 이러했다.'엄마, 나 이제 그만 갈께요. 나 다른 데로 가면 여기서처럼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거야.
그치? 지구는, 아니 대한민국은 너무나 살기가 힘든 곳이야. 교육방법도 잘못된 것 같애. 엄마, 나 가면 내 통장에 있는 돈의 반은 엄마가 갖고 쓰고 싶은대로 쓰세요. 나머진 아빠 드리세요.
엄마, 동생은 잘 키우세요. 나중에 내가 못한 일도 할 수 있게 훌륭하게 말이야.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너무 힘들었어. 난 사는 게 무의미한 것 같애. 왜 태어났는지? 왜 죽는지? 우린 그냥 하나님의 장난감일까? 안녕. 엄마.'
몇 년이 흘렀건만, 그리고 나의 딸은 잘 자라고 있지만 아직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무엇이 우리 아이를 이렇게 힘들게 했을까? 이 엄만, 도대체 무엇을 하기에 아이의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했을까?
요즘 아이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부대끼고 있다. 갈수록 편리와 속도를 자랑하는 문명의 이기들과 유행의 물결이 그들을 휩싸고 있다. 정보와 지식이 넘치니 부족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분별력을 갖춰야 제대로 된 것들을 챙겨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부담이 그들의 어깨에 실려 있는 것이다.
게다가 햇빛 속에 다녀야 할 아이들은 학원이며 학교 자율학습으로 한 밤의 거리를 누빈다. 학교에서는 졸지언정 밤을 밝히며 공부와 그들만의 놀이에 탐닉한다.
이러한 아이들에게는 속에 누적된 분노와 자기연민 등 감정의 쓰레기를 분출하고 위로 받는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이들이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부모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는 잡담만 늘어놓는다고 자녀들을 야단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신과 문화코드와 감성이 다른 자녀들의 고민을 이해하고 해결해 줄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고민을 해결하고 건강한 에너지로 충전시킬 수 있는 기회마저 봉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의 감정과 생각에 날개를 달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화순 ㈜현민시스템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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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2000/12/13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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