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과 알코올에 탐닉했던 철부지 대학생에서 21세기 세계를 이끌 미 대통령으로'.지난 달 7일 대선이후 법정 공방끝에 가까스로 제 43대 미국 대통령의 문에 들어선 조지 워커 부시(54)는 도덕적 상처를 안고 퇴임하는 빌 클린턴 대통령과 비교해 별반 나을 것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여자와 술에 찌든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고, 명문 집안 후광을 업은 망나니라는 손가락질이 그의 뒤를 좇아 다녔다. 미들네임 워커(Walker)의 첫글자 'W' 는 '미스터 와일드(Wild)' 란 별명으로 바뀌어 불려졌다. 유세기간 실토한 것처럼 영부인이 된 아내 로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대통령은 커녕 두 자녀의 아버지 노릇 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지 모른다.
상원의원을 지낸 할아버지, 대통령을 아버지로 둔 명문가에서 장남(4남 1녀)으로 태어난 부시의 초창기 인생은 리더십을 갖춘 '정치가'라고 불리기 보다는 훌륭한 집안배경을 가진 부잣집 아들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조상 대대로 그랬던 것처럼 동부 명문 예일대를 졸업했고, 하버드대에서 경영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다. 전투기 조종사로 군복무를 마친 뒤에는 석유회사를 창업, 재벌의 반열에 올라서기도 했다.
32세 때인 1978년 하원의원에 도전했다 낙방한 게 전부였던 그의 정치역정은 1994년 텍사스 주지사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면서 새롭게 전개됐다.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던 당시 주 의회에서도 교육자치, 범죄척결, 복지정책을 근간으로 한 그의 정책은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
1974년 주지사 임기가 4년으로 바뀐 이후 재선에 성공한 현직 주지사가 한 사람도 없었던 텍사스에서 1998년 24년 만에 처음으로 재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민주당 행정부를 갈아치울 수 있는 공화당내 선두주자라는 찬사가 나오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대통령이란 웅지를 품으면서 문제는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깨끗치 못했던 젊은 날의 전과(前科)가 앞을 가로막았다. 각종 의혹도 꼬리를 물었다. 조종사로 군복무를 마친 텍사스주 방위군이 당시 한창이던 베트남전 징집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도피처였다는 점, 예일대 입학이 당시 총장과 집안의 후광에서 비롯된 특혜였다는 것 등이 발목을 붙잡았다.
한때 당론보다 더한 보수를 자처했던 부시는 대통령 유세에 본격 뛰어들면서 '온정적 보수주의'를 기치로 유권자를 사로잡았다. 유색인종, 소외계층, 빈민지역 학교문제에 많은 땀을 할애했다. "부, 기술, 야망과 가난, 감옥, 마약중독, 절망을 가르는 벽을 허물어야 한다" 고 외쳤다.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 콜린 파월 전 합참의장, 동성연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연방 하원의원, 이민 여성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자들이 그의 캠프에 몰려들었다.
플로리다주 현 주지사인 동생 젭(47)과 함께 미국 최초의 형제 주지사였고, 2대 존 애덤스 대통령, 그의 아들 6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에 이은 역사상 두번째 부자 대통령으로 등장한 부시가 '왕가(王家)' 에 걸맞는 정치, 그리고 법정공방으로 찢길대로 찢긴 국론을 추스리는 화합정치를 펴나갈 수 있을 지 세계는 주시하고 있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입력시간 2000/12/1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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