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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50)무지막지한 세월,'우묵배미'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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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50)무지막지한 세월,'우묵배미'는 어디로…

입력
2000.1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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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사연이 많은 작가라, 박영한(53)씨와 문학기행을 다녀오고도 어떤 이야기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해진다. 그래서 "적어도 나는 인간을 생짜배기의 알몸뚱이 그대로, 충분히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저버리게 되면 좋은 소설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 그의 말에 기대기로 한다.가끔 들르는 대중목욕탕에서였다. 막 들어서는 참인데 뭔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사람들이 바둑도 두고 담배를 피우며 쉬기도 하는 평상을 혼자 차지하고 큰 대자로 드러누워 다리를 꼬고는, 여유있게 책을 읽고 있는 남자였다.

호기심이 일어 목을 빼 책 표지를 보니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문고판이다. 팬티 바람의 중년 남자에게 '폭풍의 언덕'이라? 희끗희끗 돋아난 흰머리에 뿔테 안경을 낀 그의 얼굴을 곁눈으로 쳐다보았다. 20년도 더 전에 '머나먼 쏭바강'의 표지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한 청년의 얼굴이었다.

쏭바강을 건너고 우묵배미도 지나 그가 다시 폭풍의 언덕을 떠돌고 있는가.. 저절로 미소가 번지는 듯했다. 영락없는 그의 '우묵배미' 연작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박씨의 본 모습이다.

우묵배미로 취재 가는 차 안에서 1년 남짓 전에 본 이 알몸뚱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씨도 박장대소했다. "당시 강의했던 학생들에게 리포트를 써오라고 하고는 나도 다시 읽어보던 참"이라는 것이다.

우묵배미 연작은 소설집 '왕룽일가'와 '우묵배미의 사랑'에 실린 6편의 중편소설이다. 여기에 작가의 방 한 칸을 얻기 위한 10여년에 걸친 12차례의 이사 경험을 쓴 '지상의 방 한 칸'도 이 시절의 이야기로 묶인다.

우묵배미는 '쑥배미'란 말을 그가 변형시킨 것이다. 시골 어디에나 있는, 산자락 밑으로 '쑥' 들어간 마을이라는 뜻의 쑥배미를 같은 뜻의 '우묵하다'는 말에서 '우묵'을 따서, 한 시절 우리 사회와 문학의 키워드로 자리잡게 했다.

"연작의 주인공은 사실 등장인물들이 아니고 시간입니다. 흐르는 시간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 변화의 방향을 가늠해보고자 했었지요." 박씨의 말처럼 정확히 2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묵배미의 겉모습은 제법 변해 있었다.

그가 '왕룽 일가'의 무대인 경기 남양주시 와부면 도곡 2리 이주영(74)씨의 집에 1년여 세들어 살았던 것은 1981년. 이 우묵배미로 들어가는 입구 주변지역은 요즘 '마지막 남은 한강 조망 가능 명당'이라며 아파트 신축이 한창이다.

사실상 서울과 같은 생활권이 되어버린 도농 접경지역이다. 박씨의 연작은 시간의 흐름에 쓸려 세속화, 도시화하는 이 지역의 세태를 '숱한 이름 없는 들풀과도 같은 존재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극사실적으로, 그래서 더없이 자연스러운 해학적 문체로 그렸다. 이후 TV드라마로, 영화로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오히려 이 들풀들의 모습은 많이 굴절됐다.

"아이구, 단지네 아빠 아녜요." '왕룽' 이주영씨의 집으로 들어서자 며느리 김경옥(41)씨가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한다. '왕룽 일가'에서 사사건건 시아버지 왕룽과 삐걱거리던, 서울서 시집온 불광동 새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박씨 자신은 소설에서는 딸 이름을 '나리'로 썼지만 이곳에서는 여전히 실명인 '단지'의 아빠로 통했다. 김씨는 시아버지가 달포 전 쓰러져 서울 병원에 입원중이라고 알려주었다. 20년 전 지금의 작가 박씨 나이였던 그 깐깐하던 '왕룽'도 시간의 무게가 힘겨웠던 모양이다.

이 집으로 들어오는 마을 초입에 쿠웨이트 박과 바람난 것으로 묘사된 은실네, 여주댁, 쌍과부집이 있다. 박씨가 살던 당시 마을에는 6가구, 박씨 가족 등 '셋방쟁이'들까지 합하면 10가구가 살았다. 지금은 단 4가구뿐이다.

마을은 목장의 소들을 지키느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개들이 짖어대는 소리와, 박씨가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그날 새벽에도 나는 뒤란에 가득한 새소리로 하여 잠에서 깨어났다"고 시작했던 후투티 새의 울음소리를 빼면 적요하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무대인 여주댁의 집은 완전히 폐가가 돼 있었다. 박씨 가족은 왕룽의 집에서 이 집으로 옮겨와 소를 키운다. 당시 한창 고수익사업으로 유행하던 한우 비육사업의 막차를 탔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작가의 표현대로라면 '버러지 같은 생존'을 이어가던 과수원지기 홍씨의 술주정- 신산한 삶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투정- 이 지금은 잡초가 무성한 이 집 마당에서 아직도 벌어지는 듯하다.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바람난 배서방 부부까지 세 가구가 이 집에서 살았다. 조금 외진 곳이면 어디나 이런 폐가가 남아있는 것이 우리 농촌이다.

박씨는 이곳에서 낮에는 마을 사람들과 막걸리 마시며 "마을의 개란 개는 다 잡아먹고", 여름이면 마을 앞 한강변으로 나가 물놀이온 사람들에게 우물물을 퍼다가 파는 '물장사'도 했다. 글을 쓰는 시간은 언제나 마을이 다 잠든 새벽녘이었다. 작가의 방 한 칸이야말로 그의 소망이었다.

우리 문학에서 최초로 월남전을 본격적으로 다룬 '머나먼 쏭바강'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박씨는 당시 10만 부나 팔린 책의 인세를 그 좋아하는 술로 다 날린다. "인세를 한 번 받으면, 친구들 만나 술 마시느라 집으로 돌아오는데 4박5일이 걸렸었다"고 박씨는 우스개를 했다.

이때부터 방 한 칸을 구하기 위한 그의 '처절한 대장정'이 시작된다. 부산 두구동에서 시작해 우묵배미를 거쳐, 인천 주안동, 김포군 고촌면, 고양시의 능곡과 화정, 안산까지 12차례 그는 이사를 해야 했다. 방 한 칸을 위한 이 체험이야말로 나중에 박영한 문학의 더없이 소중한 자산이자 성취가 된다.

사실 소설 속에 묘사된 우묵배미의 모습은 그가 남양주 쑥배미 마을과 경기 고양시 토당동의 모습을 혼합해 만들어낸 가상의 공간이다. 은실네의 주막은 지금 고양시 능곡역 앞에 있는, 박씨가 드나들었던 한 주점의 모습이 혼합된 것이다. 다시 차를 몰고 능곡역으로 갔다.

소설에서 이 역은 '낭곡역'으로 묘사돼 있다. 능곡은 당시로 야시장이 번성한 시골의 번화가였다. 밥집과 술집, 자전거포 등 뒤로 시장이 들어서 있는 형태는 지금도 그대로다. 하지만 이곳 뒤편 화정지구는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선 신도시로 변모했다. 그곳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러브호텔 추방 움직임은 20년 간극의 급격한 변화를 상징하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두 곳 다 옛날처럼 살갑지는 않은 분위기"라고 박씨는 말했다.

하물며 20년 세월이다. 하지만 그는 목욕탕의 알몸 사내처럼 언제나 생짜배기의 삶을 그대로 기록해온 작가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신식 인터넷 강의(www.novel21.com '박영한 소설 캠프')로 후배를 가르치는 그는 늘 "내가 그려낸 왕룽 여주댁 은실네 배서방부부 홍씨 등은 저 벌판의 끈덕진 생명력을 가진 민들레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민들레처럼 깃털을 갖고 있다. 살아남기 위하여, 그리고 쉽사리 짓밟히지 않고 잊히지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은 누구나 깃털을 갖고 있다"는 것을 먼저 강조한다.

●어떤내용

필용의 외아들 석구는 신부감으로 서울 여자 불광동 새댁을 맞아들인다. 농촌생활에 무지한 불광동 새댁과 성실 근면한 구두쇠 노인 필용 사이에는 쉴새없이 충돌이 발생한다(제1편 '왕룽 일가'). 제2편 '오란의 딸'에서는 필용의 딸 미애가 동네 건달들한테 성폭행을 당하기 전에 구출되는 사건을 통해 점차 도시화되어 가는 시골 성 풍속의 변화가 그려진다.

제3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희화화된 필치로 여주댁에 세들어 사는 과수원 홍씨와 집주인 여주댁, 셋방장이들과의 갈등을 묘사한다. 제4편 '은실네 바람났네'는 삼거리에서 주막을 열고 있는 순진한 은실네가 어느날 주막으로 찾아든 도시 건달 쿠웨이트 박과 눈이 맞아 돌아가면서 점차로 우묵배미가 세속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5편 '나리네 경사났네'는 고물장수 백 중령의 꼬드김에 넘어간 '내'가 백중령과 함께 시골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면서 고추 수집을 하는데, 마침 그해 연속된 장마로 물건 다 망쳐먹고 백 중령한테 돈까지 떼먹히는 이야기다.

마지막 6편 '우묵배미의 사랑'에서는 재단사 배 서방이 치마공장에서 만난 유뷰녀 민공례와 눈이 맞아 연애사건에 휘말려들고, 드세기 짝이 없는 배 서방 마누라가 두 남녀의 동거 현장을 찾아내 시댁으로 끌고 가 망신을 시킴으로써 불륜은 파탄으로 치닫는다.

배서방은 뒤늦게 민공례를 찾아오지만 민공례는 사내 마음이 자신의 그것만큼 신실치 못함을 깨닫고 끝내는 돌아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하종오 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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