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제33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하성란씨는 겸손하고 단정한 수상 소감의 한 대목에서 "한때 표어를 짓는 일에 몰두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열여섯 글자에 담아보려 애를 썼다.그 때 내 꿈은 '사람은 자연 보호 자연은 사람 보호'라는 표어처럼 단순명쾌한 표어를 짓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은 늘 열두 자이거나 열아홉자였다"고 말했다.
앞뒤의 문맥을 기계적으로 따르면, 이 대목은 작가가 자신의 재능 없음을 서술하는 겸사(謙辭)로 읽힌다. 그러나 기자는 여기서 하성란씨가 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과 문학 사이의 천생의 연(緣)에 대해서 넌지시 말하고 있다고 읽었다.
역사와 문학은 본래 한 몸이었다. 예컨대 '역사(학)'를 의미하는 현대 프랑스어 '이스투아르'나 현대 스페인어 '이스토리아'가 '이야기'라는 의미를 겸하고 있는 것은 그 말의 어원이 된 라틴어과 고대 그리스어 단어의 유산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역사'라고 불렀던 것은 반드시 과거의 사실에 대한 체계적 기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이야기에 가까웠다.
그 역사라는 이름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너무 커다랗고 성기다고 판단됐을 때, 거기서 문학이 분가해 나왔을 것이다. 역사의 그물코는 너무 성기다. 그것은 세상살이의 미세한 결들을 잡아내지 못한다. 또 그것은 흔히 힘센 자의 이야기, 이긴 자의 이야기다. 화사한 치장을 한 민중의 역사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아니다. 집단과 추상 앞에서 개인과 구체는 늘 약한 자,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몫은 그 약한 자, 패배자의 구체적 현실을 그리는 것일 터이다.
물론 문학이라고 해서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다. 세계는 연속적이지만 언어는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에 대한 자의식이 엷은 역사의 언어와는 달리, 문학의 언어는 늘 그 한계에 대한 자의식으로 충일하다.
그 자의식 또는 반성을 자양분으로 삼아 문학의 언어는 자신을 좀더 촘촘하고 섬세하게 갱신해가며, 역사의 언어가 사상해버린 삶의 복잡성을 낚아 올린다. 그것은 앙상한 논리의 망이 남겨놓은 숱한 구멍들을 모든 각도의 시선에 실린 정서적 환기력으로 메운다.
문학이 낚아 올리는 그 복잡성은, 하성란씨의 표현을 빌리면, 열여섯 자에 꼭 맞출 수 없는 나머지 세 자의 세계이거나 모자라는 네 자의 세계다.
그러니까 문학이 그리는 것은 삶과 세계의 잉여나 결핍이다. 반듯반듯하지 못한 것, 샐긋한 것, 삐죽 나와 있는 것을 역사는 벽장에 가두고 한 줄로 처리하지만, 문학은 팔을 활짝 벌려 그것들을 보듬는다. 만약에 삶이, 그리고 세계가 진선미를 온전히 구현하고 있는 유토피아에서라면, 문학은 더 이상 존속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세상이란 사람의 머리 속에만 있을 터이므로, 문학이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고종석 편집위원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