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길, 문화관광부 앞을 지나치자니 커다랗게 써 붙인 현수막의 표어 '문화의 세기, 문화한국'이 오늘따라 더없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래, 새 세기에는 문화야말로 경제보다도 중요해!", 혹은 "우리 정부는 문화한국을 이루기 위해 문화를 뒷전으로 밀지 넣지 않을 거야!" 하는 식의 감흥이나 공감이 한 줌 일어나지 않는다.물론 표어는, 만든 당사자들의 의도와 달리, 보는 이들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경우가 꽤 많다. 읽는 이의 생각과 읽는 상황이 표어의 생각, 표현상황과 일치하기 힘든 탓이다.
그러나 문화의 중요성을 적은 그 표어가 오늘 더 공허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유는 정부의 '문화한국'실현 의지가 의심된다는 것이다.
의심이 가는 근거는 여럿이다. 우선 정부의 고위 관료들이 음악, 미술, 연극 같은 유형의 문화물을 찾아 보러 갔다는 이야기를 최근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집힌다. 몇 정부기관에서 전문경영인, 벤처기업인을 강사로 초빙, 강연회를 열었다는 소식은 들리지만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향유했다는 소식은 좀체 들리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한 학자가 지적했듯(kcpi.or.kr/kcpisosik/91/91_6.html) '행정의 문화화'에 신경 쓰는 정부관료는 찾기 어렵다. 하기는 대통령 취임 전 여러 차례 영화관 공연장 음악회장을 찾아, 뉴스가 됐던 김대중 대통령조차 취임 후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문화예술인들은 '문화대통령'을 은근히 기대했을지 모르지만.
둘째, 정부는 경제적인 명분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준다.경제적인 명분만 선다면 다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지난 주 기획예산처는 세금과 비슷한 '준조세'를 정비하여 기업과 국민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목표 아래, 11개의 부담금을 폐지 또는 개선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문예진흥기금 모금 폐지도 들어있다. 기획예산처의 홈페이지에 따르면(mpb.go.kr/HP10006HT/HP10006HT03.html) 영화관 미술관 공연장 등의 입장객에게 입장요금의 2~6.5%을 더 내게 해 거두었던 문예진흥기금 모금을 2002년부터 폐지하면 국민의 부담이 완화된다고 한다. 27년 전부터 시행된 문예진흥기금 모금은 원래 2005년부터는 폐지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니 좀 당겨서 시행한다고 하여 문제도 없고 국민부담도 덜어지리라는 논리이다. 과연 그런가?
영화관을 자주 찾는 조카 아이만 해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6,000원의 영화관 입장료 중 390원을 내던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폐지된다고 하여 입장료를 390원 인하할 극장주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국민 부담 완화는 결국 명분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인 셈이다. 경제 논리에 밀려 목소리가 작은 문화예술인들이 문예진흥기금 모금의 조기폐지는 행정편의주의적 구조조정정책이라고 항변하는 것도 결국 조카아이와 같은 논리다(kcaf.or.kr/gonzisahang/toron.htm). 그들은 별 문제가 없기는커녕, 가난한 예술인들은 크게 위축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목표액 확보를 위해 모금폐지 이전에 개인기부금 활성화, 문화복권 발행 같은 대체안 마련이 먼저라는 주장도 한다.
해가 갈수록 문화의 중요성이 증대될 것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지 않으려면, 정부부터 달라져야 할지 모른다. 기획예산처의 홈페이지 표어는 "공직자가 생각을 바꾸면 국민이 즐겁다"이다. 정말 맞는 말이다. 공허하지 않은 표어가 그곳에 있다.
박금자 / 편집위원 par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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