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왔을 때 처음으로 한 일은 한글을 배운 것이었다. 출석부가 한글로만 쓰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은 학생들을 호명할 때 실수도 했지만 지낼만 했다. 버스노선 읽기 등 다른 일상 생활에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중간고사 때 해프닝이 생겼다. 나를 편하게 해준다고 많은 학생들이 답안지에 영문으로 이름을 표기했다. 이게 웬일인가. 답안지에는 생소한 이름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학생은 성을 'Lee' 로 표기했는데 눈을 씻고 찾아봐도 출석부엔 '레에' 란 성은 없었다. '무운(Moon)' 씨도 '?(Oh)'씨도 '?(Park)'씨도 마찬가지.
그때서야 나는 한국인들이 한국어 중심의 영문표기법을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스웨덴에서 나는 모국어가 영어나 불어라고 주장하는 아프리카 학생들을 많이 봤다.
케냐나 나이지리아에서 온 학생들에게 스와힐리어나 요루바어 같은 아프리카어가 모국어가 아니냐고 물으면 그들은 그건 오지인들이나 쓰는 말이지 그런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자신들은 영어를 쓴다고 입을 모았다. 그 이후 나는 한국인들 만큼 모국어에 자신없어 하는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다.
한글날을 제정하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을 추앙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한국인들이 다분히 영어권 사람들을 의식해 영문이름을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결과가 우스워져 버리는 경우도 있다. 영문표기가 그들에게 엉뚱하게 읽히는 것이다. 'Hyundai'로 표기되는 한국의 재벌은 영국 BBC방송에선 '휸다이'로 읽히고 한국의 중앙은행은 '한고옥은행' 처럼 들린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성은 '레' 혹은 '레에'라고 발음되기도 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들에게조차 이런 영문 표기법은 우습다. 비슷한 일이 또 있다. 서양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 베트남인, 한국인들은 성(姓)이 이름 앞에 오는 것을 아는데 영문표기로 성을 이름 앞에 쓰는 한국인은 별로 많지 않다.
한국어는 사용자수가 세계 20위 안에 드는 큰 언어다. 독일어 만큼이나 많이 쓰이는 언어인 것이다. 이런 한국어를 왜 경시하는 것일까.
나는 사용자가 900만명에 불과한 언어를 가르치지만 스웨덴에서 영어나 독일어 때문에 잘못 읽히거나 변형되는 것을 결코 원치 않는다. 요즘 나는 학생들에게 답안지에 오직 한글로만 이름을 쓰게 한다.
스벤 울로프 울손ㆍ 한국외대 스칸디나비아어과교수ㆍ 스웨덴인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