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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 (12)키예프를 알아야 러시아를 알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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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 유라시아 천년 / (12)키예프를 알아야 러시아를 알수있다

입력
2000.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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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러시아를 찾아가는 길은 마냥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블라디미르는 모스크바에서 북동쪽으로 자동차를 달리면 세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이지만, 일행이 이 곳을 찾은 때는 한 여름인데다 금요일(7월14일) 오후라 주말별장에 가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자동차 행렬이 끊이지 않아서, 옹이 하나 없이 위로 쭉쭉 뻗은 소나무와 자작나무가 좌우에 늘어선 잘 닦인 가로수 길도 웬지 답답해 보였다.그러나 정체구간을 벗어났을 때 그 끝없이 이어지는 길과 주변의 광활한 벌판에서 느끼던 호쾌한 기분은 남다른 것이었다. 볼가 강의 큰 줄기가 오카 강을 가지 쳐 흘려보내는 사이로 형성된 이 삼각주 지역은 원래 대부분 숲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외부에서 도래한 통치자인 공(公ㆍ크냐즈)들이 주민들로 하여금 숲을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고 길을 내게 했을 것이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결코 러시아의 전부가 아니다. 또 다른 러시아를 만나기 위해서는 키예프와 노브고로드, 그리고 블라디미르ㆍ수즈달 주변을 찾아가야 한다.

이 세 지역은 몽골 지배 이전, 이른바 키예프 루시(러시아)에서 각기 남서, 북서 및 북동부 지역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정치 경제적으로도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키예프와 주변 도시들은 유목민들과의 잦은 전쟁 속에서도 동서(비잔티움과 서유럽, 발칸반도, 아랍권 및 흑해렬ソ뵉피~ 연안의 유목민들)를 잇는 상업의 발달로 번성하였으되 귀족 세력이 비교적 강성하였고 노브고로드는 한자 동맹 도시들과 활발하게 교역하면서 서유럽 중세도시와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었던 곳으로 상인 세력이 강하였다.

이에 반해 블라디미르렐痴箏事~ 비롯하여 모스크바의 북동쪽에 원 모양으로 둘러서 있어 오늘날 통칭 '황금의 고리'(이는 관광용어이지 역사학의 용어는 아니다)라 불리는 일련의 도시들은 지배자인 공이 식민을 주도하면서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하였던 곳으로, 지금도 아름다운 정교회 건축물을 비롯하여 옛 도시의 흔적을 원상에 가깝게 보존하고 있다. 이 지역은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옛 러시아 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키예프 러시아는 10세기 중반 야로슬라프 현공(賢公)이 다섯 아들에게 각 지역들을 나누어 주고 그 후손들로 하여금 중요한 지역들을 서열에 따라 차례대로 통치하게 하되, 최우선권자가 키예프 대공 자리를 차지케 함으로써, 류릭 가문 지배자들이 다스리는 여러 공령의 느슨한 연합체를 이루게 되었다.

각각의 통치자들은 공(公)이라 불렸는데, 공들의 영토가 분할되다 보니 자연히 공들 사이에서 영토와 대공 자리를 둘러싼 골육상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것이 키예프 러시아의 쇠퇴를 초래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이야기되기도 한다.

공들이 자기네 거점인 도시를 건설할 때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시의 경계이자 방어시설인 성벽, 곧 크레믈을 쌓는 일이었다.

이를 영어로는 크레믈린이라고 하는데, 소련체제를 상징하는 용어처럼 된 크레믈린은 오늘날 붉은 벽돌로 개축되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모스크바의 옛 성벽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 말 자체는 러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에서 발견되는 성벽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이다. 성벽은 처음에는 흙이나 목재로 조촐하게 세워졌다가 도시의 세력이 번성하면 돌로 개축되었다.

우리가 찾아간 도시들 가운데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에서는 토성의 폐허 밖에 찾을 수 없었지만, 노브고로드의 성벽은 토성이다가 15세기에 붉은 벽돌로 개축된 것으로 모스크바 '크레믈린' 못지 않게 당당하였다. '황금의 고리'의 도시들 중에서는 로스토프에 부서진 석벽이 호수 가에 남아 있어 예스러운 분위기를 잘 자아낸다.

키예프 시대 러시아 주민들의 기본생업은 농업이었는데, 농민들은 성벽의 바깥에 거주하면서 통치자에게 세금을 납부하였고 성벽이나 교회, 궁정의 건축, 도로건설과 유지 등 부역에 동원되었다. 성벽 안쪽에는 공의 궁정과 교회, 귀족과 상인, 수공업자들의 거주지가 있었고 시장이 있었다.

도시의 주민들은 부족 민주주의의 유산이라고 할 민회(베체)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브고로드와 같은 일부 도시에서는 민회가 공의 옹립과 폐위를 결정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키예프는 러시아 역사와 우크라이나 역사의 출발점을 동시에 이루는 곳이거니와, 그 당시에는 인구 약 4, 5 만의 대도시로서 루시 전체의 정치적, 학문적, 종교적 중심지라는 자부심이 대단했고, 이는 기념비적 건축물의 축조, 법전과 연대기의 편찬으로 표현되었다.

성벽과 황금의 대문,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 사원을 건축양식과 명칭에서 본뜬 대규모 사원은 당시 이 도시의 경제력을 말해준다.

그러나 다른 공령의 통치자들도 키예프의 절대 우위를 허용하려 하지 않았고 경쟁적으로 화려한 건축물들을 지었다.

노브고로드에도 키예프의 것에 버금가는 소피아 사원이 지어졌으며 12세기 중반에는 키예프 대공 계승권을 다툴 정도로 세력이 성장한 블라디미르-수즈달 공령의 통치자들도 이에 합세했다.

블라디미르의 상징은 황금빛 돔이 찬란한 우스펜스키(성모승천) 사원일 것이다. 명예욕과 권력욕이 대단했던 안드레이 보골륩스키 공은 키예프의 소피아 사원보다 4 미터 높게 이 건물을 지으라고 명령했다.

모스크바 크레믈린 안에 있는 유명한 우스펜스키 사원은 바로 이 사원을 그대로 본떠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화려함보다 단정함과 우미함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동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있는 드미트리 사원과, 들판 너머 네를 강 언덕에 백조처럼 서 있는 포크로바(수호자) 사원을 더 좋아한다.

12세기에 지어진 이 하얀 석조 건물들은 둘 다 돔이 하나인 단출한 모습이지만, 공의 궁정교회였던 드미트리 사원은 극도로 정교한 양각부조 장식이 사면 외벽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 화려함이 서구 로코코 양식 건물의 장식을 연상해서인지 방문객들은 외벽 부조는 후대에 덧붙인 것 아니냐고 확신을 가지고 되묻기도 한다. 그러나 솔로몬 왕의 모습을 비롯해서 모든 부조는 창건 당시의 것이다.

포크로바 사원은 볼가 강 너머의 투르크계 유목민인 불가르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지어진 것인데, 전승 기념물이 저렇게 우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인접한 수즈달의 숙소에서 만난 젊은 도예가 발레리 곤차로프는 블라디미르에서 볼 것은 이 두 곳뿐이라고까지 단언하였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고건축물이 남아 있으면서 옛 정취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수즈달에 비해 화학공장의 굴뚝이 경관을 해치고 있는 블라디미르의 현실이 그에게는 못마땅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작은 도시 수즈달은 한 때 막강한 공령의 수도였다. 1차 십자군 전쟁으로 동서 교역로가 단절되는 바람에 쇠퇴해 가던 키예프 대신 러시아 전체의 정치적 중심지로 떠올랐고, 러시아 정교회 수장의 소재지가 블라디미르로 옮겨지면서부터는 종교적 중심지까지 되었던 블라디미르와 수즈달 - 그러나 이 두 도시는 같은 공령 내에 위치한 작은 도시 모스크바에 제일인자의 자리를 내놓을 운명이었다. 몽골의 지배가 그 결정적 전기였다.

한정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너도나도 돈벌이 열중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경제가 어렵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중소도시들을 다니면서 모든 주민들이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열 살 남짓한 아이들은 꽃을 팔고 이보다 조금 큰 소년들은 지나가는 자동차가 신호등에 멈추면 유리창을 세정제로 닦아 준 후 돈을 받았다.

블라디미르에서 수즈달로 가는 거리에는 주민들이 딸기 버찌 꽃 등을 팔기 위해 차길 가에 늘어서 있었다.

차라도 한 대 있으면 너도 나도 자가용 택시 영업을 했다. 야로슬라블에서 도심의 술집으로 갈 때 일이다. 가이드가 택시는 그냥 보내고 일반 승용차를 잡았다.

가격 흥정을 하니 30루블이란다. 택시였으면 150루블은 족히 드는 거리다. 서시베리아의 튜멘에서도 비슷했다.

지하경제가 성행하면서 생활과 직결된 요금체계는 고무줄 같았다. 술집은 입장료가 들쭉날쭉이다. 야로슬라블에서 간 술집은 남자는 요일별로 20~80루블을 받는데 여자는 공짜.

여자 손님을 대거 유치하면 남자 손님들은 입장료가 비싸더라도 들어올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반면 튜멘 호텔의 지하 술집은 남자가 공짜. 그런데 남자는 없고 늘씬한 여자만 득실거렸다. 어쩌다 남자손님이 입장하면 여자들이 일제히 시선을 던졌다.

러시아 사람들은 이런 요금 체계가 익숙한 듯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이방인인 우리 일행에게도 꼭 같이 대해주었다. 외국인에게는 바가지를 씌우는 중국과는 달리 '대국 러시아 기질'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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