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12월6일 영국 왕 조지5세는 아일랜드 자유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아일랜드인들은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영국의 오랜 통치에서 벗어나게 됐다.아일랜드 자유국의 성립은 켈트인과 앵글로색슨인 사이의 민족적 대립, 가톨릭교와 성공회 사이의 종교적 대립을 잠정적으로 봉합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선포된 뒤에도 아일랜드의 군사권과 외교권은 여전히 런던 정부의 손안에 있었다. 아일랜드가 '에이레'라는 국호로 완전히 독립한 것은 37년이고, 다시 '아일랜드 공화국'이라는 국호로 영연방에서마저 탈퇴해 영국과의 법률적 관계를 끊은 것은 49년이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즉 벨파스트를 중심으로 한 얼스터 지방은 지금도 여전히 영국 영토로 남아 있고 그래서 그 곳은 아일랜드와의 병합을 원하는 가톨릭교도들과 영국에 잔류하기를 희망하는 성공회신자(얼스터 유니어니스트)들 사이의 유혈 분쟁의 온상이 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켈트인이 정주한 아일랜드에 대해 영국의 침공과 식민이 시작된 것은 12세기 후반 헨리 2세 시절이다. 수세기 동안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인들의 토지를 빼앗아 이주 영국인들에게 분배했고, 그 결과로 생긴 것이 유명한 '아일랜드의 빈곤'이었다. 19세기 이래 아일랜드인들은 민족주의적 저항을 본격화했다.
1801년에는 영국 의회에 아일랜드 의원이 참가하게 됐고, 29년에는 가톨릭교도 해방법이 제정돼 가톨릭교도에 대한 법적 차별이 사라졌지만, 아일랜드인들은 토지 문제 해결과 자치권 쟁취를 목표로 저항의 고삐를 더욱더 죄었다. 그 결과로 78년 전 오늘 탄생한 것이 아일랜드 자유국이었다.
중세 이래 아일랜드의 역사 위에는 19세기 말 이래 한국의 역사가 포개진다. 아일랜드의 슬픔이 한국의 슬픔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