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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장편 '순정' / 씁쓸한 여운 남기는 웃기는 도둑의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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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장편 '순정' / 씁쓸한 여운 남기는 웃기는 도둑의 일대기

입력
2000.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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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성석제(40)씨의 소설을 읽는 큰 즐거움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능청스런 문체와 입담을 맛보는 것이다.그의 새 장편소설 '순정'(문학동네 발행)은 배를 잡게 만들다가도 결국 우리네 삶의 비감함을 되씹게 만드는 성씨의 해학적 문체가 한껏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순정'은 성씨가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 '조동관 약전' 등에서 펼쳐보였던 도둑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성석제판 영웅 서사의 완결판이라 할만하다.

주인공 이치도는 도둑이다. "도둑에 대해서 이치도보다 많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또 그는 바로 그 도둑들의 물건을 훔쳐온 도둑 중의 도둑이다.

왕 중 왕이 있다면 도둑 중의 도둑도 있는 법. 그렇지만 그는 이때까지 인간 각자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것, 생명은 훔치지 않았다."

이 도둑 이치도의 일대기가 '순정'의 내용이다. 나고 자라서 배우고 시련을 견디다 자기 세계의 일인자, 도둑 중의 도둑으로 일어섰다가 결국 몰락하고 마는 영웅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웅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의 '홍길동전' 혹은 '삼국지'류의 역사소설이나 삼류 무협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영웅 이야기는 비장하지 않다. 그의 주인공의 희극성은 돈키호테에 가깝다.

무대는 '은척'이라는 지방 소도시. 이치도는 그곳의 작부 춘매가 호박을 안고 추락하는 태몽을 꾸고 낳은 아들이다.

이치도는 초등학교 때는 만화방에서 도둑질하고, 중학 시절에는 성당에서 성배를 훔치고, 도회지로 나와서는 더 큰 도둑질을 한다. 7년간의 탈향에서 깨달은 그는 '모든 버림받은 자들과 한 패가 되는' 큰 도둑이 된다.

그는 분명 희극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성씨가 그려보이는 이치도가 독자에게 웃음보다는 쓸쓸한 비애를 남기는 것은 '도둑이든 깡패든 진정한 고수(高手)들의 시절은 가고 이제 삼류들만이 남아 망나니 짓거리를 반복하는 이 세계에서 그들은 그 어떤 비극적 영웅보다도 더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고 더 영웅답기 때문'(평론가 신수정)일 것이다.

마치 겨울 화롯가에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사설조로 들려주는 구연(口演)자처럼 성씨는 이치도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언어의 축제로 보여준다. 소설은 욕설과 상소리, 해학과 반어, 웃음과 눈물이 어울려 있는 말의 잔치판 같다.

성씨가 근엄함을 벗어던지고 구사하는 문체는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웃기는 이야기를 닮았다.

"제대로 도둑질도 못하는 도둑놈들이나 남들이 소리치고 떠드는 소리에 신경을 쓴다.

진짜 도둑이 무서워하는 건 뒤에서 버럭버럭 소리나 지르는 사람이 아니다. 한창 신나게 도둑질을 하고 있을 때 소리없이 다가와 바로 귓전에 따뜻한 입김을 내뿜으며 '바쁘니?'하고 속삭이는 사람이다."

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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