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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산상봉 /평양에서 - "애비없이 어찌 살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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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산상봉 /평양에서 - "애비없이 어찌 살았니"

입력
2000.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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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이산상봉 평양 스케치30일 오후 4시45분 평양 고려호텔 단체상봉장에서 헤어진 북측 가족들을 만난 남측 가족들은 2시간5분 동안 서로의 손을 놓지 못했다.

■ 단체상봉

피난통에 북에 홀로 남겨두고 온 큰 아들 상순(55)씨의 얼굴을 마주한 한정서(韓貞瑞ㆍ80)씨는 반세기 동안 외로웠을 아들을 부둥켜안고 눈물만 흘릴 뿐 말이 없었다.

"애비 구실 못해서 미안하구나"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고생이랴뇨" "다 아버지 염려 덕택입니다" 담담한 얘기였지만 50년의 한을 담긴 대화였다.

아버지는 "남에 있는 네 어머니(정성실ㆍ79)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아느냐"며 부인이 함께 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8ㆍ15 1차 상봉 당시 109세 노모의 사망 사실을 뒤늦게 통보 받은 장이윤씨에게 방북기회를 양보했던 우원형(禹元亨ㆍ67)씨는 여동생 옥희(64)씨와 남동생 인형(61)씨를 상봉하는 순간 "어디 보자.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울부짖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옥희씨는 단체상봉장에서 오빠를 보자마자 달려가 끌어안고 상봉장 바닥에 주저앉아 "오빠야. 어디갔다 이제왔어"라며 오열했다.

우씨는 "너희들을 알아보지 못할까 봐 오는 동안에도 사진을 보고 또 보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1951년 1월 종교 탄압을 피해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온 양철영(楊澈泳ㆍ81ㆍ서울 마포구)씨는 부인 우순애(73)씨의 손을 놓지 못한 채 "혼자서 시어머니 부양하고 아들 손자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평양 산정현 교회 성가대에서 함께 활동하다 결혼한 양씨 부부는 함께 남행을 결심,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인 황해도 송화를 떠났으나 구월산 전투 때문에 이산가족이 됐다.

'요즘도 혼자 기도를 드리느냐'고 물어보려던 양씨는 "위대하신 수령님과 장군님의 인덕정치, 광폭정치 때문에 잘 살고 있다"는 부인의 말에 준비한 말을 거두었다.

북의 동생 박해조(59) 해범(56)씨를 만난 박해수(朴海洙ㆍ72ㆍ서울 광진구)씨는 수집한 일가 친척의 사진 50여장을 세세히 분류해 동생에 전달하고 비디오 카메라로 동생들의 모습을 직접 담기도 했다.

서양화가 김한(金漢ㆍ73ㆍ서울 강서구)씨는 북에서 유명 서정시인이 된 동생 김철(67)씨 가족과 만나 "생전 아버지의 모습과 똑 같다"면서 연신 동생의 얼굴을 매만졌다.

당초 방문단에 포함되지 못했다가 참가 예정자의 포기로 방북 길에 올랐던 김명식(金明湜ㆍ89ㆍ경기 포천군)씨와 이경훈(李京勳ㆍ84ㆍ경북 김천시)씨는 조카들과 만났다.

■ 환영만찬 및 평양도착

남측 가족들은 단체상봉 후 량만길 평양시 인민위원장이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한 만찬에 참석,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량 위원장은 환영사에서 "평양 시민들과 공화국 북반부 인민들은 여러분이 2박3일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헤어졌던 가족 친적들과 상봉하여 가슴 뜨거운 혈육의 정을 나누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고, 이에 봉두완(奉斗玩) 남측단장은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서 깊이 상처 받은 이산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려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이에 앞서 남측 방문단은 이날 낮 12시45분 대한항공 815편을 이용, 김포공항을 떠나 오후 1시50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허해룡 북한 적십자회 부위원장, 최원식 평양시 인민위 부위원장 등의 환영을 받았다.

/평양=공동취재단

■북 장재언단장

제2차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을 인솔한 장재언(張在彦ㆍ64)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장은 북한의 민간 외교 전문가로 대남 문제에도 밝다. 1989년 조선가톨릭교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외부에 알려졌으나 출생지와 학력 등에 대해선 자세히 드러나 있지 않다. '장재철'이라는 이름도 사용하며, 가톨릭 세례명은 사무엘.

1994년부터 조선종교인협회 회장을 겸임하면서 남측 종교인들의 방북 창구 역할을 맡아왔고, 1998년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된 이후 줄곧 이산가족 문제를 주관해 왔다.

이 밖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 본부 중앙위원(1990년)과 부의장(1998년), 조ㆍ일 우호친선협회 부회장(91년) 등 여러 직책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해 왔다. 1990년 최고인민회의 제9기 대의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98년 제10기 대의원에 재선됐다.

국제 감각을 갖춘 매너와 업무 추진력이 뛰어나 고위층으로부터 상당한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에 일본을 방문했고 1995년에는 빌리 그레엄 목사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는 등 민간 외교에도 일찍부터 눈을 떠 미국과 일본에 지인이 많다.

장충식(張忠植)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월간조선 인터뷰기사 내용을 문제 삼아 이산가족 방문단 상호교환을 재검토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장 총재의 유감서한 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어 서울에서의 활동이 주목된다.

이태희기자

taehee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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