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88) 화백이 반세기를 꿈꿔 온 동생 기만(71)씨와의 재회를 앞두고 쓰러진 뒤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아들 완(51)씨는 "앰뷸런스에 옮겨태우지도 못할 정도로 아버지의 병세가 나빠 작은 아버지께서 직접 병원에 오셔야 형제 상봉이 가능할 것"이라며 "지난 번 병실에서 모자가 만난 사례가 있는만큼, 이번에도 남북 당국이 예외를 허용해 주기를 바랄 뿐"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4년째 병마에 시달려온 운보는 지난달 27일 동생이 북측방문자 1차 명단에 포함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었다.
당시에도 제대로 몸을 가누기 힘든 상태였지만 의사소통은 가능했었다. 그러나 너무 마음을 졸인 탓일까. 운보는 최종 명단 발표 하루를 앞 둔 17일 그만 다시 쓰러지고 말았다. 패혈증과 고혈압 병세가 악화해 지금껏 삼성서울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다.
운보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겨울 전북 군산의 처가로 피란길을 나섰다가 다섯 동생들과 생이별을 했다. 열아홉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뒤 자식처럼 길러온 동생들이었다.
운보는 40년이 지난 91년 한 정치인을 통해 꿈에도 잊지 못하던 동생들의 소식을 처음 들었다. 헤어질 당시 서울시립미술연구소 연구생이었던 셋째 동생 기만은 56년 평양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북한의 대표적 조선화가로 30여년간 활동, 공훈미술가 칭호까지 받았다고 했다.
94년에는 중국 시인을 통해 기만씨의 편지와 작품 5점이 전해졌다. "언제나 잊지 못하고 뵙고 싶던 형님에게. 연로하신 몸, 건강에 주의하시면 우리 형제가 머지않아 기쁜 상봉을 하리라 확신합니다. 형님 그림 '정청'의 모델이었던 막내 여동생 기옥이는 의사가 됐어요."
이듬해에는 동생의 작품 20여점을 서울로 들여와 '형제작품전'까지 여는 등 상봉이 눈 앞에 온 듯 했지만 남북 관계가 급랭하면서 운보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힘겨운 투병생활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충북 청원집 방에 작은 아버지의 그림을 걸어놓고 늘 바라보셨다"고 전한 아들 완씨는 "50년을 그려온 동생을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못한다면 평생의 한이 될 것"이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안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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