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은 어떠한 경우에도 죄악이며 어느 수준에 이르면 실제로 사회의 재앙이 될 수 있다." 가톨릭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 나오는 조항이다.경제학은 실업이 어떤 경우에도 죄악이라는 명제를 거부한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적 실업이나 탐색적 실업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이 주종을 이루는 유럽연합의 여러 나라에서 실업률이 10%를 넘나든다. 회칙에 충실한 교회와 성직자라면 정부를 준열히 꾸짖고 즉각 시정하든지 아니면 물러나라고 몰아 세우고도 남을 상황이다. 그러나 이렇게 정치ㆍ경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 별로 없다.
우리나라에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상당수의 성직자 사상가 작가 노동운동가 시민운동가들이 가슴이 뜨거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가끔 신문의 5단 광고로도 접할 수 있는 이들의 요구사항은 다양하다. 공기업 해외매각 반대, 대우차 국민기업화, 국민기초생활 보장, 농가부채 탕감, 노조와의 합의 없는 인력감축 반대 등이 몇 가지 예이다. 이것들은 도덕적으로 지당하고 경제적으로 일리있게 보인다.
그러나 찬 머리를 중시하는 경제전문가가 보기에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단견(短見)이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은 대부분 맨몸으로 군부독재와 맞서 싸워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루어 낸 분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사회비리와 불의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것은 마땅하다. 못 가진 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옳은 일이다.
그러나 경제는 반독재투쟁과는 달리 뜨거운 가슴만으로 접근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우리 경제가 성장일변도의 길을 질주해 오는 가운데 한편으로 투명한 제도와 원칙이 없고 다른 한편으로 저효율구조가 고착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투명한 제도와 원칙을 세워 공정하게 운용하고 저효율을 타파하는 것이 구조조정의 핵심이다.
공기업과 대기업에 만연한 저효율을 타파하는 데에 인력감축ㆍ임금삭감은 필수적이다. 이건 비인간적이면서도 자명한 사실이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면을 중시하여 이러한 노동부문개혁을 반대한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의 우두머리는 대통령이다. DJ는 반독재민주화투쟁을 벌여온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과 정신적 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들이 제시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구조조정방식에 동감한다. 이런 DJ의 성향 때문에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
1998년에 어렵게 정리해고제를 법으로 허용해 놓고도 첫 시금석이 된 현대자동차 노사분규 때 법을 제치고 정치논리로 접근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김우중씨는 정리해고 없이도 구조조정을 할 수 있다고 화답하였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이런 미봉책 때문에 현정부가 말끝마다 구조개혁을 뇌었지만 2년 반이 지난 지금 구조조정이 전혀 안되어 있는 것이다.
경제구조조정은 옛 영국수상 대처가 했던 것처럼 찬 머리로 해야 한다. 구조조정을 확실히 하고 난 후에야 뜨거운 가슴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경제를 잘 안다던 DJ는 이런 우선순위를 뒤바꾸어 경제의 불확실성을 높였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은 이제 경제구조조정에 관한 한 선무당 노릇을 그만두고 경제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이들이 뜨거운 가슴을 드러내야 할 분야는 썩은 정치와 관료사회의 부패구조를 척결하는 과업이다.
선진국에서도 보기 드물고 우리 경제에 버거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까지 갖추어졌다.
정부ㆍ관료조직ㆍ정치권의 비효율과 부패를 뿌리 뽑는 한편 대우차 구조조정과 같은 본격적인 경제구조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더이상 '말로만 개혁'에 머문다면 DJ개혁도 YS개혁 꼴이 된다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안국신ㆍ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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