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노벨평화상 수상자 중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은 두명이었다고 한다. 1990년 세계냉전체제 해체에 기여한 공로로 수상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1991년 버마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수상한 아웅산 수지 여사다.90년 당시 소련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의 극심한 혼돈 와중이어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크렘린궁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웅산 수지 여사는 버마 군사정부의 물리적 저지로 노르웨이 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식 참석을 위한 출국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수상식 참석 반대론자들은 "경제위기 등으로 국내상황이 절박한데 대통령이 빈번하게 나라를 비우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내치에 보다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석 불가피론을 펴는 측은 노벨평화상 수상이 민족적 경사인데다 수상식 참여 자체가 국가신인도 및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귀중한 기회로 이를 적극 활용하는 것이 국익에 보탬이 된다고 반박한다.
이번 '아세안+3' 및 싱가포르ㆍ인도네시아 국빈방문을 위해 김 대통령이 출국할 때도 비행기 뒷꽁무니를 향해 빈정거림이 적지 않았듯이 국민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의 잦은 외국 방문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고 있다.
물론 김 대통령은 외국방문 중에 수행기자단이 허덕일 정도로 국익 세일즈를 위해 강행군을 한다고 한다. 하지만 국내 경제사정이 어려운 데다 정치적 갈등이 깊어지면서 대통령 외국방문의 긍정적 측면보다는 내치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비난 쪽으로 여론이 흐르는 것이다.
분위기가 이러니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당시 많은 국민들이 느꼈던 감동은 새까맣게 잊혀지고 수상식 참석을 위한 출국에 대해서도 "또 나가?"라는 심정이 앞서는 것 아닌가 싶다. 이런 정서가 정치적으로 변주돼 정치공세로 활용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상당한 국가적인 자산이다. 이를 수긍하지 않고 고까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그 자산을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이미 수상 자체로 효과를 다 얻은 만큼 굳이 수상식에 참석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수상식 불참은 당연히 세계 언론의 주목꺼리가 되고 실제보다 국내상황이 훨씬 심각하게 비칠 수 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 평가에 악재로 작용할 것이다. 시장의 심리관리가 경제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신인도 악화와 시장불안을 자초하는 선택은 미련하다
수상식 참석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수상식 불참으로 초래될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수상식에 참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아무일 없는 척 수상식에 참여한다고 해서 우리경제에 문제가 없고 그것을 세계의 시장이 그대로 믿어줄까마는 어려운 상황이 실제보다 부풀려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리사정이 1990년 고르바초프가 처했던 소련과는 다르지 않는가.
물론 김 대통령의 수상식 참여를 기꺼워하지 않는 국민들의 심리관리도 중요하다. 김 대통령이 임기 반환점을 돌아서면서 급격하게 지지도가 떨어진 데에는 국민의 심리관리에 실패한 탓이 크다.
소수파 정권의 한계나 반대파의 발목잡기를 탓하는 것을 뛰어 넘어 국민의 마음을 잡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정 단축 등 수상식 참석 모양을 손질하는 것도 그런 지혜의 하나가 아닐까.
이개성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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