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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11)중세의 도시-샹파뉴 지방의 정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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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세이-유라시아 천년/(11)중세의 도시-샹파뉴 지방의 정기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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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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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도시의 넘치는 자유' 그것은 단지 신기루였을뿐서양 중세의 도시하면 으레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는 격언을 떠올린다. 부자유스러운 예속신분이 일반적인 중세 사회에서, 도시만이 자치권을 누려 도시민들은 자유로운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즉 중세 도시의 시민들은 서약단체로서 자치공동체를 형성하여 독자적인 사법권과 행정기관, 심지어는 시민군을 지녔다. 서양의 사가들은 공동체적인 자치체로서의 이러한 특징이 중세 유럽에서 독특할 뿐만 아니라 유럽 문명의 한 원류를 이룬다고 강조한다.

도시민들의 자유정신이 유럽 문명을 다른 문명들로부터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특징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중세에 샹파뉴의 정기시가 열렸던 트루아와 프로뱅을 찾은 것은 7월 30일이었다. 열흘 넘게 찌푸렸던 날씨가 오랜만에 활짝 개었다. 파리 시내를 빠져나와 달리자마자 곧 넓게 펼쳐진 농촌 풍경이 나타났다. 치즈로 유명한 브리지방이다.

프로뱅은 일-드-프랑스 지방이 끝나고 샹파뉴 지방이 시작되는 접경지역의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파리로부터 19번 국도를 따라 동남쪽으로 84km가 되는 거리이다.

지금도 12~13세기에 돌과 벽돌로 만들어진 성곽과 구시가가 옛날 그대로 남아있다. 프로뱅은 13세기 중엽 활발한 교역의 중심지로서 1만명이 넘는 주민을 거느렸다. 오늘날에도 인구가 1만명이 조금 넘는다니 그간의 쇠퇴가 실감난다.

프로뱅에서 점심을 하고 19번 국도를 따라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곳이 트루아다.

트루아는 랭스와 더불어 샹파뉴를 대표하는 도시이며 랭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고도이다.

트루아가 번영을 누리게 되는 것은 11세기 초에 샹파뉴 백작령의 수도가 되면서부터이다. 당시 유럽은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활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하나는 '중세의 농업혁명'이다. 중쟁기, 삼포제, 물방아로 대표되는 농업기술의 개선과 대규모 개간사업으로 농업생산량이 크게 늘어났고 이것이 인구의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중세의 절정인 13세기 중엽에 서유럽 인구는 6,000만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프랑스의 인구는 3분의1을 넘는 2,200만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화폐, 특히 은화의 주조이다. 그 결과 도시가 부활하거나 새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중세 도시의 규모는 작았다. 13세기 중엽 당시 유럽 최대의 도시는 베네치아로 인구가 10만명에 불과했다. 100만명이 넘는 대도시를 거느렸던 비잔틴이나 중국과 비교하여 당시 유럽의 생산력 수준은 미미했기 때문이다.

제노바와 밀라노가 5만~10만명이었고, 이탈리아 이외의 지역에서 최대의 도시는 5만명의 파리였고, 런던은 2만5,000명에 불과했다. 트루아와 프로뱅이 1만명을 넘었다면, 당시로서는 대단한 수치였다.

지방적인 소규모의 경제활동의 부활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 원거리 통상의 부활이다.

11세기부터 남쪽에서는 지중해, 북쪽에서는 북해와 발틱해를 중심으로 장거리 교역이 되살아났으며, 유럽의 무게중심이 북서부로 이동함에 따라 양 무역로가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지중해무역은 기본적으로 동서무역이었다.

동방물산으로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후추를 비롯한 각종 향신료이며 그밖에 비단 설탕 명반 등이었다. 이에 대한 서방의 상품은 모직물이었고 모자라는 것은 은화로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양모와 모직물의 주 생산지가 각기 영국과 네덜란드였다는 점이다. 모직물의 판로는 지중해였고, 동방향료의 소비지는 서유럽이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플랑드르의 모직물을 구하기 위해 론강을 거치거나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했다. 급기야 11세기 후반부터 플랑드르의 상인들이 중도에서 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만나는 지점은 양 지역의 가운데쯤인 브루고뉴가 아니라 샹파뉴 지방이었다.

왜 그랬을까? 샹파뉴 백작들은 정기시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익을 재빨리 알아차렸고 샹파뉴 정기시를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샹파뉴는 12세기에 들어 유럽 최대의 상품 및 화폐 교환을 위한 정기시가 되었다. 매년 6차례의 시장이 개설되었다.

1~2월의 라니(파리 동쪽 30km) 정기시, 3~4월의 바르(트루아 동쪽 52km) 정기시, 5~6월의 프로뱅 '5월정기시', 7~8월의 트루아 '여름정기시', 9~10월의 프로뱅 정기시, 11~12월의 트루아 '겨울정기시'가 그것이다. 각 정기시로 보자면 1년에 한두달 정도의 기간에 불과하지만, 샹파뉴 정기시 전체로 보자면 일년 내내 시장이 열리는 셈이다.

정기시가 다가오면 텅비다시피하던 장터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가게들이 문을 연다. 샹파뉴 백작은 감독관을 임명하고 거래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제반조치를 취하고 특히 치안유지를 위해 재판소가 설치된다.

처음 2주에 걸쳐 '옷시장'이 열리며, 그것이 문을 닫으면 '무게를 재는' 향료시장이 개설된다. 이러한 모든 거래에는 계약서가 작성되며, 아울러 화폐와 어음이 함께 교환된다.

상인들은 모든 거래와 인신의 자유를 백작으로부터 보장받으며, 그 대가로 거래 대금의 통상 60분의1 정도를 거래세로 낸다. 백작은 샹파뉴에서의 자유만이 아니라 예컨대 프랑스의 국왕이나 다른 제후들과 조약을 맺어 상퍄뉴로의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한다.

트루아에 자치행정이 나타난 것은 12세기말~13세기초였지만 백작으로부터 특허장을 부여받은 것은 1230년의 일이었다. 이는 물론 자치권이 백작의 호의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모든 도시가 이러했던 것은 아니며, 일부 도시는 특히 성직자가 영주였을 때는 자치권을 얻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도시는 국왕이나 영주의 용인 아래 상당한 세금의 납부를 대가로 자유를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유란 봉건제의 틀 속에서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자유는 흔히 도시의 행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소수 과두체제의 자유에 불과하기 십상이었다. 그렇기에 중세말 유럽의 도시들은 격렬한 계급투쟁에 휩싸이기 일쑤였다.

13세기말부터 샹파뉴의 정기시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계급투쟁과 높은 세금, 그리고 샹파뉴 백작 가문의 쇄락과 국왕 직영지로의 편입을 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정기시의 성공이 몰락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2세기에 가까운 오랜 기간에 걸쳐 유럽은 정기시를 통해 새로운 경제기법을 배워 13세기말~14세기초에 이르면 더 이상 정기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지중해와 북해 사이에 직항로가 13세기말에 개통되었으며, 상관제도가 상설시장의 기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쯤이면 왕권이 강해져 새로운 영토국가 변두리의 도시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도시들이 자치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중세도시의 자유란 사실상 신화에 불과하며, 유럽인들의 '근대적 자유'는 결코 중세적 자유의 직접적인 유산은 아닌 것이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후원 삼성전자

■프로뱅·트루아

프로뱅과 트루아는 중세 유럽 도시의 모습이 아직도 살아있는 곳이다.

프로뱅의 옛 시가지는 12~13세기 돌과 벽돌로 만든 성곽에 둘러싸여 있다. 옛 시가지에는 중세 도시의 특징들, 예컨대 유사시를 대비하기 위해 중심부에 설치한 높은 망루, 견고하고 높은 성채와 깊은 외호(外湖), 이중의 성문, 중앙의 광장, 교회와 부속건물, 꼬불꼬불한 마을길 등이 남아 있다.

이중 망루는 원래 로마 요새가 있던 자리에 만든 것으로 세자르망루 또는 세자르탑이라고 부른다. 이런 유적들 때문에 지금도 중세 유럽 도시의 모습을 보려는 여행객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프로뱅시도 여행객을 유치하기위해 홍보활동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트루아는 1524년 대화재로 1,000여채의 가옥이 불타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중세 도시의 모습이 잘 보존돼있다. 성벽이 있던 자리만 대로로 바뀌었을 뿐 안쪽에는 트루아의 구시가가 그대로 남겨져 있다.

구시가에 가면 중세 도시의 규모가 크기만 작을 뿐 건물이나 인구 밀도는 매우 높았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곳이 '고양이 골목'. 폭 2.1m로 두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중심지의 좁은 길이다.

작은 운하나 옛 상인들이 통행의 안전을 빌었음직한 작은 교회들에서도 당시 도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도 구시가의 가게에는 수공업자들의 문장이 걸려있어 중세 도시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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