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수록 인간존엄 의미 깨달아야"1970년대 유신과 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을 거치면서 '광주의 정신적 지주'자리를 지켜온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尹恭熙ㆍ76ㆍ빅토리노)대주교가 30일 정년 퇴임한다.
1973년 11월30일 광주대교구장을 맡아 27년동안 사회정의와 소외받는 이들의 삶에 각별한 애정을 쏟아온 윤대주교는 이제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와 기도와 묵상 생활을 하게 된다.
사회 불의와 폭압에 항거하며 이땅의 민주화를 앞당긴 상징이기도 한 윤대주교는 온화한 성품과 달리 신앙적 양심과 사회적 책무 앞에서는 굽힘이 없는 '작은 거인'으로 통한다.
80년 5월 서슬퍼런 총구앞에서도 '사제적 양심'으로 스스로 몸을 던져 수난의 십자가를 졌던 참 사제인 윤대주교는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인간생명에 대한 존엄과 사랑의 근본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고 강조했다.
_광주대교구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벗고 순수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앞으로의 생활은.
"지난해 3월 교황청에 사직을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제야 퇴임하게 됐다.전남 나주의 광주가톨릭대 사택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며 살고 싶다. 후임 최창무(崔昌武ㆍ64ㆍ안드레아) 대주교 혼자서 수 많은 신자들의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다하기는 힘들 것이다. 교구장을 도와 견진성사를 집전할 계획이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은 윤대주교의 삶을 '산전수전 다 겪은 가시밭길'로 비유하며 "정의를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참된 사제의 길을 살아오신 분"이라고 평했다. 사회정의와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애정을 갖게 된 동기는.
"50년 3월 사제서품 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많은 점을 깨달았다. 당시 피난길에 성당을 찾아와 고해성사를 청하는 신자들과 부산 유엔포로수용소 군종신부로 근무하면서 '임종대세(臨終代洗)'를 받고 죽어가는 이름없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고 '인간의 존엄성'과'정의'에 대한 남다른 사제적 체험을 했다. 63년 주교 수품 후 로마에서 열린 바티칸 공의회에 참가해 '교회의 쇄신'에 관해 토론하면서 '세상과 함께 하는 교회'에 대해 깨닭게 됐다"
-재직기간 중 보람과 기억에 남는 일은.
"73년 착좌(着坐)한 이후 광주대교구의 신도수가 6만에서 27만여명으로 4배이상 늘어 '민중과 함께 하는 교회'로 거듭 날 수 있었다. 84년 방한한 교황성하께서 광주를 가장 먼저 찾아 상처받은 시민들에게 용서와 화해, 평화의 메시지를 주시고 소록도 나환자들을 축복해 주신 것이 기억에 남는다"
_북한에 가족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불어 통일운동에 힘쓰실 생각은.
"북한에 있는 누이 윤요안나(66)와 조카 2명을 만나기 위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놓았다. 그 동안 미국에 있는 친척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식은 들어왔으나 꼭 만나고 싶다. 남쪽에서 편히 살면서 찾지도 않는다는 책망을 들을 지도 모르겠다.통일운동에 관한 개인적인 계획은 없다. 교회안에 민족화해위원회가 남북천주교 교류를 추진중인 것으로 안다"
_경제가 어렵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에서 교회의 역할은.
"하느님의 계명속에 '정의 '가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개인간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정의를 요한다. 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윤리성과 정의가 관철되도록 노력하고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지역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지난달 처음으로 무등산 정상에 올라 광주시내를 바라보며 문득 하느님이 모세에게 말한 '약속의 땅'은 어디일까 생각했다. 광주가 발전하면 이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니겠는가. 이 지역은 그 동안 시련을 딛고 민주화에 크게 이바지한 긍지의 땅이다. 앞으로 온 겨레와 함께 통일과 평화의 땅을 만들고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시민이 되었으면 한다. 5ㆍ18해결을 위해 노력했으나 아직도 완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광주=김종구기자so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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