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는 옛 동독지역에서 가장 매혹적인 도시다. 괴테며 실러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다.실러박물관을 찾았다가 거기서 열리고 있는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100주기 기념전시회를 '만끽'하는 행운을 잡았다. 지난 4월에 개막해서, 오는 12월31일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고타르트터널이 언제 완성되지?"라는, 말년의 니체 자신의 독백을 '주제'로 내건 이 잘 짜여진 전시회에서, 뜻밖에도 한글로 쓴 붓글씨 작품이 걸린 것을 보고 놀란다.
니체의 유명한 시 한편을 한국의 서예가 한별 신두영(申斗榮)이 꾹꾹 눌러 쓴 것이다. 시는 '진정 나는 불꽃이어라'가 절구(絶句)다. 본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인데 곁에 독일어 원문이 소개돼 있다.
글씨, 또는 글씨쓰기가 소멸되어 가는 시대에 잘 생기고 힘있는 한줄 붓글씨와 그 문기(文氣)를 유럽 사상사의 한 자락을 과시하는 전시장에서 보고 느낀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유럽인들도 한글이나 붓글씨의 조형(造形)에 대해 잘은 모를지라도, 그 낯선 문자 앞에서 '글씨쓰기'에 상념이 닿을 수는 있을 것이다. 글씨를 쓴다는 것은 문명한 인간의 기본이고 그 표징이기 때문이다.
글씨쓰기는 지금 어디서나 무시되거나 쫓겨나는 중이다. 펜은 자판을 두드리는 '입력'으로 대체되었다. 복사용 A4용지말고는, 글이 일의 거의 전부인 신문사 편집국에서조차 종이가 사라졌다.
각급 학교 교육과정에 '쓰기'가 아직 남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더구나 붓글씨따위는,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최근에 다행이라고 생각된 일의 하나는, 몇몇 교수가 원고지에 펜으로 쓴 리포트를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불편을 무릅쓰고 '글씨'를 보겠다는 이유는 만연된 '복사', 또는 '복제' 문화의 폐해를 잘 알기 때문이겠지만 '잃어버린 쓰기' 습관을 복원하겠다는 의미가 있다.
월간 시 전문지 '현대시학'은 그 편집주간인 정진규 시인이 붓으로 쓴 '이달의 시'를 싣는다. 거기 낙관 도서 가운데는 '讀不如一寫(독불여일사:읽는 것이 한번 베껴 씀만 못하다)'라는 것이 있다. 그 옛날 수도자들이 경전을 옮겨 적는 수행을 중요하게 여겼듯이 요즘 그리스도교 신앙인들도 성경 쓰는 공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쓴다는 것은 정성이고 집중이다.
요즘 같은 초고속 정보화시대에 웬 뚱딴지냐고 할 것이다. 더구나 경쟁력만이 지상(至上)인 세계화 물결 속에서 붓을 들어 먹물을 찍는 것은 저효율의 극치일지 모른다. 당장 '구조조정'해서 퇴출시키는 것이 시장원리에도 맞는 일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기만 한 것일까. 비교우위가 없는 농업은 그 종사자들이 '야반도주하거나 자살하거나'의 막다른 골목에 몰려도 어쩔 수 없어야 하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 대신에 노동이라는 돈벌이의 수단만을 중시해야 하는 현실에 눈 감아야 하는 것일까.
한번쯤 인간의 기본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프린터로 빼낸 가지런한 리포트의 편의주의 보다 정성들여 눌러쓴 원고지의 인간미가 더 소중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계절이 어느새 한해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캘린더가 성탄인사와 연하카드의 때를 알려준다. 다시 노숙의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위기가 절박하지만, 그럴수록 복제(複製)인쇄물 아닌 한장 따뜻한 친필의 편지인사로 묵은 정들을 나누었으면 한다.
억장 무너지는 가슴을 안고 고속도로 점거에 나섰다가 돌아간 우리 고향의 농민 형제들에게 자신의 생업을 잘라내는데 눈물로 동의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에게, 그리고 마침내 인간을 잃어버려가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의 우리들 자신에게.
정달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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