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효서의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소설가 구효서(43) 씨의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마음산책 발행)는 평범한 사물들을 탈것으로 삼은, 평범치 않은 시간 여행의 기록이다. 그것이 먼 여행은 아니다.
그 여행의 끝은 1960년대의 강화와 그 이후의 서울 변두리다. 그러니까 그 여행의 행선지는 작가가 겪어보지 못한 머나먼 과거가 아니라, 작가가 몸으로 겪어낸 가까운 과거다. 요컨대 '인생은 지나간다'는 작가의 유년기와 성장기의 기억이다. 구효서 씨는 자신의 옛날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들려주는 자신의 옛날 얘기가 특별히 마음의 줄을 퉁기는 것은 그것이 가난한 시절의 사물들에 매개돼 있기 때문이다.
구효서 씨는 이 책에서 물동이와 변기에서 텔레비전과 연필을 거쳐 도시락과 주걱에 이르는 스무 개의 사물에 몸을 의탁해 자신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 밋밋한 사물들은 작가가 겪은 일화(逸話)들을 원기소로 삼아 생명력을 얻고,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내 뭉클하게 만든다.
아니, 모든 독자가 이 책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구효서 씨의 기억에 공감하며, 즉 그 기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물기어린 눈으로 자신의 아스라한 과거를 되돌아볼 수 있는 독자들은 아마 40대 이상의 독자들, 그 가운데서도 유년기가 그리 풍족하지 못했던 독자들일 것이다. 세대적 조건만 맞으면 경제적 조건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40대 이상의 독자들이라면, 그 시절 대개 가난했을 테니까.
예컨대 "교과서 서너 권쯤은 으레 흐른 김치 국물에 젖었다 마른 볼썽 사나운 귀퉁이를 갖고 있었다. 다 말라도 벌겋게 부풀었던 자국은 끝내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다"('도시락'중에서)라거나 "사전 지식이나 경험 없이 좌변기와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앉는 거지?'하고 고민했던 사람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민 끝에 두 발을 좌대에 얹고(어쨌든 급하니까)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자세로 쭈그려 앉았을 테니 쾌변가망절대불가일 수밖에"('양변기' 중에서) 같은 문장 앞에서 공감의 웃음을 짓지 않을 그 세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 전체가 '누구나의 '얘기인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 세대의 공통적 경험 위에 작가 개인의 때로는 가슴 아리고 때로는 요절복통할 에피소드들을 점점이 박는다.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작가의 유년기의 동무들과 가족들이다. 그래서 '인생은 지나간다'는 사물들의 역사이자, 그 사물들을 사용하거나 그 사물들에 얽매인 어떤 개인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사물들과 함께 인생은 지나간다. 독자들의 인생도, 구효서 씨의 인생도. 구효서 씨가 소설을 못 쓴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지만, 이 책은 구효서 씨의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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