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지 말자는 주의였다. 우리글만으로도 뜻이 통하는ㄴ데 굳이 배우기 어려운 한자를 쓸 필요가 뭐가 있냐고 그런데 십수년간 다른 나라에 살면서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한국사람은 한자를 잘 배우고 써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개인과 국가 경쟁력이다'며칠 전, 같이 북경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는 한국학생들과 재미삼아 한글문장 안의 한자단어를 골라보았다. 써 놓고 보니 반 이상이 한자였다.
'이왕''인색''모자'등은 물론 심지어는 '심지어(甚至於)'라는 말까지 한자라는 것을 알고 몹시 놀라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어휘의 70%가 한자에서 온 것이라니 우리말을 잘 하려면 당연히 한자의 뜻과 쓰임을 잘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게다가 한자는 중국, 일본, 동남아를 포함한 한자문화권이라는 거대한 지역에서 널리 쓰이는 문자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영어를 배워야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것처럼 한자문화권에 속한 우리는 영어와 더불어 한자를 알아야 이웃한 나라들과 보다 매끄럽고 단단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반 서양아이들은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을 아주 부러워한다. 우리들이 한자를 외우고 있으면 '한자문화권에서 자란 사람들도 다시 외울 것이 있냐'며 의아해한다.
이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유럽사람들이 같은 라틴어에서 파생된 몇 나라 말을 하는 것은 몹시 부러워하면서 정작 우리가 가진 한자문화권이라는 강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매일 말하고 보고 듣고 하는 한자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충분히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강점인데 말이다. 한국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우리 학교 북한 여학생은 한자를 '그리는' 수준이다.
난생처음 보는 한자가 도통 외워지지 않는다며 힘들어한다. 북한은 철저한 한글전용이다. 학교 때 300자 내외로 배우기는 해도 주요과목이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한자를 전혀 쓰지 않기 때문에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단다.
한번은 "안중근 의사는 무슨 과 의사입네까?"라고 물어서 한바탕 웃었다. 내가 '醫師'가 아니라 '義士'라고 써 보여주니 그제서야 머리를 끄덕이며 "조선 사람들은 한자를 반드시 알아야 하겠습네다"라고 한다.
나는 다행이 한자를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던 때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게다가 한문선생님이 호랑이였기 때문에 매 시간 보는 쪽지 시험준비를 꼭 해 가야했다. 당시에는 한자도 선생님도 꼴 보기 싫었지만 그 때 배운 한자를 25년이 지난 오늘까지 너무나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우선 일본어와 중국어 공부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고 있다. 세계 여행 중에도 한자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일단 한자를 쓰는 곳과 사람은 낯설지 않았다. 특히 중국 오지여행은 한자를 몰랐다면 재미가 반의 반으로 줄었을거다.
라오스 북부 정글에서 길을 잃고 헤맬때 한자는 내 목숨까지 구해주었다.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그 나라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화교들과의 만남도 시작은 사석에서 나눈 한자 필담이었다.
이렇게 하는데 대단한 실력이 필요한것은 아니다. 현재 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1,800자만 제대로 읽고 쓴다면 한자문화권과 기본적인 교류를 하는데 커다란 문제가 없다고 본다.
문제는 이 기본 교육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입학 시험에 안 나오는 과목이라서' 한문시간에 다른 것을 공부하든지 자든지 한단다.
담당선생님들도 중.고등학생이 되면 이미 입시나 영어에 신경을 쓰는 분위기라 어쩔수 없다는 얘기다.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허무하게 결정적인 한자 습득 기회를 놓치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래서는 안되는 일이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한비야
여행가.난민구호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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