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11월23일. 이틀전 한국정부로부터 SOS를 긴급타전받은 국제통화기금(IMF) 파견단이 자금지원조건 협상을 위해 방한했다.협상이 시작된 이 순간부터 한국은 경제주권을 박탈당했고, 가혹한 'IMF 신탁통치'는 시작됐다. 그로부터 꼭 3년이 지난 오늘 한국경제는 다시 '위기'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3년은 좌절에서 도약, 신기루, 다시 고통으로 빠져드는 반전의 파노라마였다.
▲좌절의 시기(97년11월~99년2월)
6ㆍ25이래 최대의 국난이었다. 환율은 2,000원, 금리는 30%까지 치솟았다.
주가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200대까지 곤두박질쳤다. IMF의 긴급수혈과 외평채 발행, 대외단기 채무조정으로 국가부도위기는 넘겼지만, 실물경제기반은 완전 파괴됐다.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시작된 구조개혁으로 은행불사(不死), 재벌불사의 신화는 깨졌지만 그 당장의 대가는 실업자 양산이었다.
99년2월 실업자수는 178만명까지 늘어났다.
▲ 도약의 시기(99년3월~99년11월)
저금리정책과 국제경제여건 호전(저유가 세계경기호황)은 실물경기를 소생시켰다.
3월이후 생산증가율은 20%선을 넘어섰고, 11월 실업자수는 100만명이하로 떨어졌다. 정부는 "약속대로 1년반만에 IMF체제를 졸업하게 됐다"고 선포했다.
'대우의 침몰'이란 초대형사건이 벌어졌지만 경제의 암세포를 제거한 탓에 대외신인도는 올라갔다.
▲ 신기루의 시기(99년12월~2000년8월)
넘치는 돈이 벤처ㆍIT(정보기술) 열기와 융합되면서 주식시장은 폭발, 종합주가지수가 1,000벽을 돌파했다.
모두들 '골드러시'를 꿈꾸며 주식ㆍ벤처시장으로 달려갔다. 98년 1차 구조조정이후 은행ㆍ기업부문의 부실제거는 중단상태였지만,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인식만 팽배해갔다.
하지만 3월이후 현대사태, 4월 총선을 치르면서 거품은 일순간 빠져나갔고, 뒤늦게 시작된 금융ㆍ기업구조개혁은 경기를 더욱 결빙시켰다.
▲다시 시작된 고통(2000년9월~)
9월이후 소비ㆍ투자심리가 꽁꽁 얼어붙었고, 이는 실물경기의 극단적 위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업자수는 다시 100만명 돌파 초읽기에 들어갔고, 금리ㆍ환율ㆍ주가의 동반약세장이 이어지고 있다. 세계경제마저 경(硬)착륙하는 날이면 97년 사태의 재연은 불가피해 보인다.
국민경제를 절체절명의 부도위기에서 건져낸 3년의 성과를 결코 평가절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외환보유액이 1,000억달러가 되어도, 두자릿수 성장률이 지속되어도 위기는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다. 단 100억달러라도 외국자금이 한꺼번에 빠져나간다면 위기재발은 불보듯 뻔 한 일이다.
■어떻게 해야하나
결국은 구조조정이다. 침체한 실물경기회복을 위해선 소비ㆍ투자가 살아나야하고, 소비ㆍ투자진작을 위해선 주식시장이 활성화해야 하나, 자금유입으로 증시가 회복되려면 무엇보다 구조개혁이 철저하게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필연적으로 희생을 동반하는 구조개혁은 국민적 동의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 때문에 '리더십'은 구조개혁 성공의 전제조건이다.
만성 개혁피로증과 도덕적 해이에 빠져있는 경제주체들에게 개혁을 설득하기 위해선 추락한 정부의 권위회복이 선결되어야 한다. 정부부터 '초심'으로 돌아가야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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