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드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서남쪽으로 2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옛날 같으면 낙타를 타고 일주일은 걸려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이제는 아스팔트로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 우리 일행은 4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처음 2/3 정도의 구간은 평지를 달리다가 지작이라는 도시를 지나면서부터는 구릉지대로 접어든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 끝자락인 셈이다. 여러 차례 고개를 넘다보면 산기슭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이동하는 가축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가 자라프샨 강이 흐르는 계곡으로 접어드는데 이곳에 바로 사마르칸드가 위치해 있다. 자라프샨(Zarafshan)은 '황금을 뿌리는'이라는 뜻이다.
일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이곳에 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말해준다.
시내로 들어서면 코발트 블루나 녹황색의 타일로 덮힌 커다란 돔들이 눈에 띈다. 이것은 티무르 제국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형태인데 현대식 건물에도 이러한 전통적 양식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이른바 '사마르칸드의 영광'이란 바로 이곳을 도읍으로 삼은 정복자 티무르(1336~1405)와 그의 후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오늘날 사마르칸드를 화려하게 만드는 구리미르(티무르의 무덤), 샤히진다(귀족들의 공동묘지), 레기스탄(모스크로 둘러싸인 중앙광장)도 모두 이 때에 세워진 것이다. 소련에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회복 강화하려는 '역사찾기'의 하나로 지난 몇 년 동안 이들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주민들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내부장식이 된 일류급 호텔도 세워서 이제는 외국인을 맞을 준비까지 갖추었다. 아쉬운 것은 이와 함께 과거의 고졸한 모습도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마르칸드는 티무르의 도시만은 아니었다. 이 도시는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지금부터 몇 해전 도시창건 2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벌였으니 그만큼 역사가 오랜 도시이기도 하다.
흔히 '오랜 전통'을 자랑하기 위해 가능하면 옛날로 끌어 올리는 일도 드물지 않지만, 사마르칸드의 경우 2500년이라는 숫자가 결코 허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도시는 이미 기원전 500년경 다리우스 대제(BC 522~486)에게 정복된 뒤 오랫동안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기원전 329년에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마라칸다(Marakanda)'였지만 후일 사마르칸드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고, 고대 중국인들은 이 도시의 중간 음을 따서 '강국(康國)'이라 칭했다. 이 도시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동하던 상인이나 관리들이 강(康)이라는 중국식 성을 채용한 것도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르칸드는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 그것도 동서의 문명이 교차하는 중앙아시아의 한 가운데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지난 2천여년의 시간이 남긴 굵은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도시 가운데에 이제는 폐허가 된 채 남아있는 아프라시압이라는 이름의 언덕이 그 좋은 예이다.
학자들의 발굴에 의해 이 언덕이 1220년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파괴된 사마르칸드 구도시가 있던 자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늘날의 사마르칸드는 말하자면 몽골의 침입이 있은 뒤 그 옆에 세워진 신도시인 셈이다. 당시 이 도시의 파괴를 생생하게 기록한 '세계정복자의 역사'라는 문헌이 있다. 이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사마르칸드에 도착하여 하루 이틀 성벽을 둘러보며 적의 취약점을 살핀 뒤 사흘째 되는 날에 공격을 개시했다고 한다.
시민들은 용감하게 저항했고 심지어 코끼리까지 동원해서 막아보려 했지만, 단 하루의 전투만으로도 이미 승산이 없는 싸움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항복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던 성채 안의 병사 3만명은 결국 몰살되고 말았다. 주민들은 성밖으로 물러났고 몽골군은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하도록 성벽을 완전히 파괴해버렸다.
이렇게 해서 국제교역으로 번영을 구가하던 중세도시 사마르칸드는 하루 아침에 흙더미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아프라시압 언덕을 발굴하던 학자들은 그곳에서 7~8세기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궁전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들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벽화에는 여러 지역의 사신들의 모습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두 사람의 사신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발굴 당시에는 보다 분명한 채색을 띄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색이 많이 바래서 그 희미한 자욱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머리에 쓴 깃털이 달린 모자, 허리에 찬 긴 칼, 가지런히 두 손을 모아 공수한 모습을 통해 우리의 조상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신도가 나오게 된 역사적인 상황에 관해서는 아직도 많은 수수께끼가 남아 있지만, 이것이 당시 사마르칸드가 누렸던 명성과 영광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자료임은 분명하다.
'대당서역기'의 주인공 현장법사의 기록도 사마르칸드의 번영을 입증해 주고 있다. 629년 당나라 수도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로 향하다가 이곳을 통과한 현장은 이 도시국가의 영역이 600~700km에 달했고 도성의 성벽 둘레도 8km가 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주민의 숫자가 많고 물품을 만드는 기교가 뛰어났으며 여러 나라의 보화들이 모여들었다. 뿐만 아니라 '자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병사들은 용맹하기 짝이 없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는 '용사'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차카르(chakar)'를 옮긴 말인데, 그들은 당시 당나라와 압바스조의 궁정에서 근위병으로 이름을 날린 용사이기도 했다.
중세도시 사마르칸드의 번영의 토대는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무역에 있었다.
소그드(Soghd)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앙아시아 도시 출신의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무대로 동으로는 중국에서 서로는 지중해에 이르기까지 넓은 교역망을 운영하며 활약하여, '한 푼을 두고 서로 다투며 이익이 있다면 가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사마르칸드는 교역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문화의 합류점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종교가 유입되어 각기 독자적인 사원과 교회를 갖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 선악의 투쟁을 중심으로 이원론적 우주관을 표방했던 마니교, 로마영내에서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피해 나왔던 동방기독교, 아랍인들의 팽창과 함께 등장한 신흥종교 이슬람. 이런 종교들이 모두 경쟁하며 공존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이슬람이 우위를 확보해가자 다른 종교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티무르의 시대에 이슬람의 우위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로써 사마르칸드는 무한권력을 추구하는 정복자의 과시욕의 무대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적 다양성과 활력으로 충만하던 중세도시 사마르칸드의 종지부를 찍은 장본인은 역설적이지만 이 도시의 성벽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던 몽골인들이 아니라 이곳을 도읍으로 삼고 엄청난 건축물로 채워놓은 티무르 제국이었던 것이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협찬 삼성전자
▲"한국제품은 부자들만 살수 있죠"▲
우즈벡 곳곳에 한국 입김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각광받는 나라는 한국이다. 타슈켄트에서 고속도로로 빠지는 남서쪽 외곽에 세워진 이빠드롬(시장이라는 뜻)시장은 우즈베키스탄 최고의 도매시장. 우리 남대문시장처럼 물건을 싸게 사려는 일반 소비자들도 즐겨찾는 곳이다.
이곳은 아예 시장 구획이 '우즈벡 시장' '터키시장' '한국시장' 세 군데로 나뉘어있다. '한국시장'은 한국산 상품만 파는 곳. 타슈켄트 동방대학교 한국어과 강사인 한국계 김샤샤(24)씨는 "한국 시장의 상품이 가장 고급이고 인기도 좋다"고 들려준다.
이 때문에 서울~타슈켄트를 수ㆍ금요일 운행하는 아시아나 항공은 우즈베키스탄 보따리 장사들이 주고객이다.
시내 곳곳에서 보는 새 차는 모두 대우 아니면 현대 것이며 전차는 삼성전자의 대형광고판을 달고 있다. 타슈켄트 최대의 국영백화점(굼)에서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아브로르 무사예브씨는 "한국산은 고급품이라 부자들만 살 수 있다"고 들려준다.
무엇보다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대통령이 박정희대통령의 경제개발을 배워야 한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에서 발견하는 것은 오히려 박정희 개발독재의 우울한 유산들. 호텔에도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는 것이나 임시검문을 대비해서 외국인은 호텔 숙박증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은 긴급조치때를 방불케 한다.
전통의 흙집은 새마을운동 때처럼 슬레이트지붕으로 바뀌고 있다. 김호동교수는 "건조하고 더운 이곳 기후에는 전통적인 초가지붕이 최고인데 무작정 저렇게 바뀌고 있으니 안타깝다"고 말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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