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를 향해 타도의 칼을 빼어 든 지 1주일만에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자민당 전 간사장의 이미지는 180도 바뀌었다.그는 자민당내 제2파벌의 영수로 몇 년 동안 강력한 총리후보로 꼽혀 왔지만 여론조사에서는 여야 정치인 가운데 지지도 5~6위에 머물러야 했다. '정치인보다는 평론가'라든가 '우유부단하다'는 인상 때문이다.
지난해 9월 총재선거 때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총리에 맞서 당내 주류파의 미움을 샀을 때만 해도 그는 특별한 각오보다는 그저 최선을 다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국민의 75%가 반대하는 내각을 지지할 수 없다"며 반란을 선언한 지난 10일 이래 그의 표정에는 머뭇거림 대신 반드시 뜻한 바를 이루겠다는 단호한 결의가 선명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일본 국민들은 평가했다. 19일 TV아사히 여론조사에서 그는 처음으로 지지도 1위를 기록했다. 20일 심야의 내각 불신임안 표결 결과와 관계없이 국민적 정치 지도자로 부상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스스로의 말대로 그가 국민과는 거리가 먼 자민당내 파벌간 타협에 의해 총리가 되고자 했다면 지난해 총재선거 때나 이번에 가만히 있는 것이 나았다. 잘 되면 국민의 지지 속에 화려하게 총리에 오를 수 있지만 자칫하면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처럼 영원히 총리 자리와 멀어지는 도박을 택한 것 자체가 커다란 변신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일본에서 최고 엘리트의 길을 걸어 왔다. 명문 히비야(日比谷)고교와 도쿄(東京)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아사히(朝日)신문에 합격했으나 입사하지 않고 이듬해 외무고시를 거쳐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7년반 동안의 외무성 시절, 그는 타이베이(臺北)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중국 문제를 연구하고 홍콩총영사관과 중국과에 근무하는 등 중국 전문가로 컸다. 유창한 영어와 중국어 실력도 그때 닦았다.
정계 진출을 서둘렀다면 내무성 관료 출신으로 중의원 5선 의원이던 아버지 세이조(淸三)가 급서한 1965년에 쉽게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정세 공부'를 이유로 후원회의 요청에 응하지 않다가 1971년 말 외무성을 나와 이듬해 33세의 나이로 야마카타(山形) 2구에서 당선된 이래 내리 10선을 달성했다.
정계에서 그는 일찌감치 자민당 제2파벌인 고치카이(宏池會)의 왕자로 불렸다.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전 총리가 창설,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ㆍ스즈키 젠코(鈴木善幸)ㆍ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로 이어진 파벌이다. '보수 본류'를 자임하면서도 역사ㆍ방위 문제에는 온건 자세를 보여 온 파벌의 전통은 국제파인 그를 더욱 당내 개혁파로 만들었다. 특히 중국과 한국에 대한 이해는 거의 독보적이다.
도쿄=황영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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