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금융구조조정의 막이 오르면서 은행원들이 벼랑 끝에 섰다. 이번 구조조정에서 직장을 떠나야 하는 은행원은 전체 9만여명 중에서 3,000여명. 남아있는 은행원들도 아직 구조조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공포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더구나 잇따라 터지는 일부 은행원의 파렴치한 금융사고로 그나마 지켜왔던 자존심마저 허물어졌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국민혈세로 엄청난 퇴직금을 받아간다"는 비난도 쏟아진다.
1998년 1차 금융구조조정, 2000년 2차 금융구조조정 그리고 언제 또다시 구조조정 한파가 몰아칠지 모르는 불안함. 우유부단하고 무계획적인 구조조정 속에서 은행원들은 일손을 놓은 채 도덕성마저 상실해가고 있다.
한빛은행 Y지점장 L(49)씨는 주변 사람들의 표현대로라면 '행복한 은행원'이다.
1998년부터 이어진 수차례의 구조조정 한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리를 꿰차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1976년 옛 상업은행에 함께 입행했던 동기 30명 중 단 2명만이 살아남은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은행 때문에 외환위기가 왔다"느니 "은행원들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느니 따지듯 내뱉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그는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 뿐이다.
"일견 맞는 말이죠. 그래도 우리는 공적자금으로 퇴직금을 받잖아요. 직장에서 쫓겨나고 돈 한푼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사치스러운 항변일 수도 있으니까요."
금융지주회사가 출범하면 다시 대규모 인원감축이 불가피하다는 설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은행원들도 날로 늘고 있다.
"주먹구구식으로 벌써 몇 차례 은행원들을 거리로 내몰고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니요. 나가는 사람의 명예를 짓밟고 남아있는 사람들의 의욕과 사기를 떨어뜨릴 뿐입니다."(한빛은행 J씨)
풋내기 은행원들의 자괴감 또한 만만찮다. 입행 3년차인 조흥은행 K씨(30)는 요즘은 출근해도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
부서 선배들은 이리저리 동요하며 부산하기 그지없고, 번번이 터지는 초유의 금융사고에 얼굴을 들고 다니기 부끄러울 정도다. 게다가 공적자금 투입은행에는 퇴직금누진제를 폐지하고 여차하면 봉급조차 동결한다는 소식에 그저 멍해질 뿐이다.
"차라리 명예퇴직이나 했으면 좋겠어요. 비전도 없고 인정도 못받는 은행원이라는 자리를 평생토록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게 끔찍합니다.
하지만 하위 직급에 대해서는 명퇴도 없으니.."
이번에 미련없이 명예퇴직을 신청한 외환은행 P과장의 항변은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병든 환자를 몇차례씩 수술을 하면 제대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은행원들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마땅히 책임져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무참하게 짓밟아버린다면 우리나라 금융의 미래는 없는 겁니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정상원기자
orno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