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사와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사 공동주최 '제3회 한일교류좌담회'가 8일 일본의 나라(奈良)현 카시하라(?原)로얄호텔에서 '한일문화의 원류와 교류-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교류사'를 주제로 열렸다.참석자들은 나라지방을 중심으로 양국의 고대 문화교류를 분석하면서 21세기의 바람직한 교류방향을 모색했다.
△이어령(李御寧ㆍ좌장) 새천년준비위원장 △김현구(金鉉球) 고려대 사범대학장ㆍ일본고대사 △신경철(申敬澈) 부산대 고고학과장
△우메하라 다케시(梅原 猛ㆍ좌장) 일본펜클럽회장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토대 명예교수 △이노쿠마 가네가쓰(猪熊兼勝) 교토 다치바나(橘)여대 교수
'내일의 땅' 아스카의 국제성
▦우메하라=일본에서는 흔히 '아스카(飛鳥)ㆍ나라(奈良)시대'라고 한 묶음으로 말하는데 율령(律令)체제가 대체적으로 아스카시대에 구축돼 나라시대에 완성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스카를 제2의 개국 시기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쇼토쿠(聖德) 태자입니다. 그는 정치가이면서 사상가, 철학가였습니다.
불교는 고구려스님 혜자(惠慈)로부터, 유교는 백제의 각가(覺?)씨에게서 배웠습니다. 가정교사가 두 나라에 있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선생님은 혜자 뿐 아니라 백제스님 혜총(惠聰)도 있었는데, 교양습득과정이 국제적이라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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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이어 중국과 국교를 맺고 겐즈이시(遣隋使)를 파견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여러 문화를 중국에서 수입했고 국제적인 외교를 했으며 실질적 헌법을 만들고, 불교 중심이지만 유교 도교도 함유된 삼교일치(三敎一致)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또 여러 사상을 통일함으로써 와(和)룰 기본으로 삼은 사회를 만들려 했는데 그런 원리는 이후 일본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됐습니다. 일본 7~8세기의 역사를 이야기해 봅시다.
▦이어령=쇼토쿠 태자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인물입니다. 부상약기(扶桑略記)를 보면, 백제성왕의 친손자인 아좌태자(阿佐太子)가 쇼토쿠 태자를 만났을 때 매우 놀라는데 일본에 불교를 준 성왕(聖王), 일본에선 성명왕(聖明王)이라고 합니다만, 성명왕이 환생한 것처럼 닮았기 때문입니다. 태자의 전신은 불교를 갖다 준 성왕이라는 거죠.
이렇게 반쪽 역사, 즉 일본의 고대사 반쪽과 한국의 고대사 반쪽만 가지고는 풀 수 없는, 두 개의 깨진 거울을 맞췄을 때 하나의 온전한 모습이 나타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서로를 위해 역사를 다시 읽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특히 아스카문화는 일본문화의 시초요, 한국에서 보면 가장 일본과 밀접했던,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으로서 오고 가는 가장 가까웠던 시절이기 때문에 문화교류의 원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어령=아스카는 명일향(明日香)이라고 써놓고 또 도부도리, 비조(飛鳥)라고 씁니다.
도부도리의 도부는 한국어로 '날다'이며 새라는 것은 나는 새도 있지만, 한국말로 날이 새다, 일본어로 아케루의 의미가 있습니다. 날새는 내일, 명일이고 향은 일본말로 가오리인데 한국말로 가사블, 고을입니다.
비조를 훈으로 읽으면 내일의 고을, 내일의 땅이 됩니다. 아스카지역으로 많이 온 백제인들에게 이 곳은 내일의 땅, 미래의 땅, 새로운 땅이었습니다.
일본 드림을 갖고 왔던 백제인들의 새로운 고을이다, 이런 뜻이 될 것 같습니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꿈을 안고 내일의 땅을 만든 곳이 아스카입니다. 아스카를 얘기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내일의 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에다=아스카시대에는 페르시아 중국사람들도 와 있었지만 가장 관계깊은 것은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삼국이었습니다.
소가(蘇我)씨가 세운 아스카지(飛鳥寺)의 가람 배치는 중간에 탑이 있고 금당이 3개 있는 1탑 3금당이라는 양식인데 고구려에서 나온 양식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혜자(惠慈), 혜총(惠聰)은 일본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스님입니다.
또 스이코(推古) 10년(서기 602년) 백제로부터 관륵(觀勒)이라는 스님이 불교 뿐 아니라 천문지리서, 도교, 법술서 등을 가져왔는데 이 사람도 아스카지에 산 적이 있습니다. 아스카가 내일의 고을이라는 것은 참으로 맞는 말씀입니다.
▦김현구=아스카의 국제성을 살펴 보겠습니다. 4세기 때 이미 대륙에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옵니다.
10명중 8~9명이 대륙에서 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다카마츠즈카(高松塚)에 나오는 여인들의 의복이 고구려 쌍용총(雙踊塚)의 의복과 일치합니다.
기토라(キトラ)고분의 천체도는 평양 근처에서 본 하늘과 같습니다. 아스카에서 확실한 것만 해도 긴메이(欽明) 덴무(天武) 지토(持統) 몬무(文武) 등 4명의 천황릉이 있습니다. 공주에는 송산리(松山里)고분이라고 해서 왕릉의 일군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도 닮은 점이 많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또14~15세기에는 한국에서 왜구라고 불렀습니다만, 당시에는 해상(海商)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을 탈국적성, 국적을 초월한 사람들로 볼 수 있는데 아스카에 와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스카지의 모양은 고구려에서 오고, 건축기술자들은 백제에서 오고, 백제 고구려에서 온 승려들이 전부 여기 묵었던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라의 호류지를 둘러보는 좌담회 참석자들./요미우리신문 제공
도래인들의 특성과 문화 기여
▦이노쿠마=야요이(彌生)시대 이래 한반도와의 교류는 빈번해지만 유랴쿠(雄略) 천황 때인 475년 백제에서 아스카에 고급관료로 추정되는 두 개의 큰 집단이 건너옵니다.
와카야마(和歌山)현의 기노카와(紀川)를 건너 왔을 겁니다. 기노카와에서 여기까지 여러 한반도 유적이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그 중에서 야마토(大和)쪽에 가까운 것이 이마키(今來)라는 곳입니다. 도래인이 '방금 왔다'는 뜻으로 그 지명이 됐을 거예요.
아스카땅에 왜 도읍이 생겼는가에 대해 정서적인 문제를 생각한 바 있습니다. 공주 부여의 궁궐은 아스카도읍을 고르듯이 구릉을 요새로 삼아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본은 백제를 본받아 그런 곳에 도읍을 만들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어령=발굴 이야기를 하면, 좀더 폭넓은 논의가 가능할 것입니다.
쓰다하치만(隅田八幡) 인물화상경에 '503년 8월10일 백제 무녕왕시대에 남동생인 왕(繼體ㆍ게이타이 천황)이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며 이 거울을 만들었다'고 돼 있는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비슷한 이름들을 찾아 해석해봤지만 영 맞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녕왕릉 발굴에서 사마가 무녕왕의 이름이란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또 다카마츠고분 벽화에 나오는 치마의 오방색은 오늘날 한국의 색동한복과 똑같습니다.
▦이노쿠마=오진 천황때 왔다는 하타(秦)씨, 아야(漢)씨 가문의 인물이 어떻게 일본문화에 공헌했고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했는지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또 교키(行基)라는 사람은 도래계의 아주 가난한 집안 태생이지만, 쇼토쿠 태자가 정착시킨 불교를 저변까지 침투시킨 인물입니다. 주로 한국에서 건너온 도래인이 일본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가야, 백제의 관계
▦신경철=일본과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한국은 청동기문화였습니다.
청동기문화가 일본의 조몬(繩文) 말기 농경문화에 충격을 주어 북부 규슈(九州)로부터 야요이문화가 시작됩니다.
야요이 전기말인 기원전 2세기 후반 대에는 한반도 남부와 상당한 교류가 시작되는데 주로 한반도로부터 일본열도로 들어오지만, 일본열도에서도 한반도로 일정하게 들어옵니다. 북부 규슈의 야요이토기는 한반도 남해안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토기뿐 아니라 왜인(倭人)도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철을 입수하기 위해 들어온 것 같습니다. 한반도 남부와 일본열도 간에 쌍방 교류가 시작된 것입니다.
삼국시대가 되면 일본열도와의 교류가 북부 규슈에 한정되던 것이 긴키(近畿), 즉 야마토로 전환하는 것 같습니다.
일본계 토기는4세기 전반까지 일본에서 제작된 것들이 가야땅에 들어오다가 4세기 중엽 후반대가 되면 가야땅에서 토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들이 가야지역에 머무름에 따라 4세기 후반대에는 그들의 2, 3세가 가야에서 토기를 만듭니다. 금관가야가 건재할 때까지 대 한반도 교섭창구는 금관가야였습니다.
금관가야 해체 후 한반도 교섭창구는 영산강 유역으로 바뀌어 지속적으로 인적 교류가 있었고, 선진문물도 유입된 것 같습니다.
백제와의 유기적 관계는 5세기 말 이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에다=왜인이 한반도 남부에 삼한시대부터 있었다는 유적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을 할 때 현재의 국가나 국경의 개념으로 고대를 논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문화를 물건만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문물론은 문화가 아닙니다. 물건 교류의 배후에는 사람의 교류가 있습니다.
도래를 4단계로 나누면 제1단계는 야요이, 제2단계는 5세기 전후, 제3 단계는 5세기 후반, 제 4단계 7세기 중엽으로 생각하는데 5세기쯤 많은 도래인이 왔고, 야요이 전기에는 금속기를 가져왔고 당연히 도래인들이 왔을 것입니다. 도래시기를 특정한 시기에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경철=일본열도, 가야, 백제는 뭔가 공동운명체적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교류를 단계별로 나누면 제1단계 야요이시대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 2단계 5세기 초 가야와 일본의 교류, 이 때부터 일본열도의 문화는 가야의 분위기로 변합니다만,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이어지는 제3단계에서는 백제와 깊은 관련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이노쿠마=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걸쳐, 소위 일본의 후기 고분이 가야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헌에는 삼국유사에 가야문화에 대한 것이 조금밖에 없고 일본에서도 가야문화와 백제문화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고분의 피장자론(被葬者論)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양동리(良洞里), 대성동(大成洞), 지산동(芝山洞), 이런 고분군에 대해서는 일본도 여러 면에서 더욱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에다=재작년 아스카무라(明日香村) 남쪽에서 아주 훌륭한 연못이 발굴됐습니다.
사이메이(齊明)천황때 만들어진 것으로 물을 넣는 시설이 여러가지 있는데 경주 안압지의 유적과 공통성이 있습니다. 안압지는 문무왕이 한반도 통일을 기념해 만든 것입니다.
아스카무라의 연못은 덴무 14년에 덴무천황이 만들었다는 학킨고엔(白錦後苑)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신(壬申)의 난을 넘기고 일본을 통일한 뒤 안압지를 의식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유적의 동쪽에 있는 사카후네이시(酒船石)도 신라와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스카를 조사한다는 것은 고대의 도시계획을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김현구=적어도 4세기 후반에는 백제와 야마토조정이 깊은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 이전에 백제와 일본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중국과의 교류는 낙랑(樂浪)이나 대방(帶方)을 통해 이루어지다가 300년대 초 두 나라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해 북쪽을 통해 들어가는 길이 막히고 선진문물이 더 필요해져 중국에 가까운 내륙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백제까지 가게 된 게 아닌가, 적어도 4세기 중반 이후엔 야마토정권이 적극적으로 백제와의 교류를 추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세기 중반 이후는 정치적으로 백제와 야마토조정을 중심으로 생각해아지 가야 중심은 곤란하다고 봅니다.
하늘에서 본 아스카무라의 전경. 아래쪽에 7세기의 돌무덤 이시부타이 유적이 있다./요미우리신문 제공
문화적 이질성과 갈등의 順機能
▦이어령=역사적으로 일본에서는 화(和)를 많이 쓰지만 한국에서는 인(仁)을 많이 씁니다. 신라시대때는 불교적인 융(融)입니다.
차이는 있지만 '융합하는 것'이라는 뜻은 같습니다. 서구의 경우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이항대립이 서구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스이코 천황 11년 진평왕(眞平王)이 보낸 고류지(廣隆寺)의 국보 1호 반가사유상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서구적 사유는 아주 심각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지만, 반가사유상은 고통과 미소 사이의 중간항에 있습니다.
인터미디어트 컬처(INTERMIDIATE CULTURE)입니다. 초월적인 것과 현세적인 것, 고통스런 생각의 갈등과 그것을 뛰어 넘어려는 것의 팽팽한 긴장, 동시에 릴랙스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중간항의 인터미디어트 컬처입니다..
이것이 한국과 일본문화의 공통점으로 이어질 수 있는 21세기의 인터내셔널 컬처입니다. 인터넷 인터랙티브 인터페이스, 컴퓨터 네트워크가 전부 '인터(inter)'입니다. 발신자가 수신자고 수신자가 발신자입니다.
개인이자 집단입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있음으로써 네가 있다는 소위 인터랙티브, 콘비비얼리티(CONVIVIALITY), 이런 것들이 아스카문화에서부터 내려오는 한국과 일본의 공통적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우메하라=그 불상은 한국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즐거운 모습으로 사유하는 표정의 아름다움은 서양철학자 야스퍼스를 감탄시켰습니다. 미륵보살은 56억7,000만년 전에 나와 미래의 세계는 어떻게 되어야 하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쇼토쿠 태자도 미래일본의 모습, 천년, 2천년 후의 세계의 이상을 생각했던 사람이 아닐까요?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이상을 추구한 사람을 표현한 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의 일본, 내일의 세계를 생각하는 불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내일의 동아시아와 세계를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필요합니다. 한국사람들은 일본에 살면서 일본문화에 공헌했습니다.
최근엔 한국에서도 일본사람들이 살면서 새로운 문화권을 형성한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양국이 교류를 통해 형성한 문화는 유사하지만 차이도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에다=이런 좌담회에서는 공통성 얘기만 자꾸 하는데, 다른 것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질성을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봐요. 오늘 테마는 '원류와 교류'인데, 근원을 찾는 루트(ROOT)론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길을 찾는 루트(ROUTE)론이 필요합니다. 같은 것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차이점이 생깁니다. 다르니까 교류가 생기는 거죠.
▦이노쿠마=무녕왕의 관은 일본 고야마키(高野木)라는 나무로 만들었고 고류지는 한국의 적송으로 만들었습니다.
서로 다른 나라 문화를 이용하는, 이것을 공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본이 젓가락과 숟가락을 쓰고 식사하게 된 것이 덴무(天武) 천황때인데, 헤이안(平安)조가 되면 숟가락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세계에 예가 없는, 수프를 젓가락으로 먹는 테이블 매너가 생깁니다. 전혀 다른 문화로 발전해간 거죠.
의복도 독자적인 기모노로 발전했습니다
▦이어령=다르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화나 융이 나타나지 않죠.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말하지만 산업주의 속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모였던 것과 달리, 각자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통하기 위해서는 이질성을 더욱 강조해야 합니다.
이질적인 것과 아픈 데를 건드리지 않고 피해가는 것은 통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은 영원히 이질로 놔두는 꼴입니다.
갈등관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창조적으로 끌고 가는 다이나믹한 조화가 중요합니다. 융합이란 것은 오히려 치열한 것입니다.
▦김현구=문화 교류는 문화를 한 차원 높이는 작업이 아니겠습니까. 흔히 고대에도 그렇게 긴밀한 관계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김춘추는 642년 고구려에, 647년 일본에 갔고 648년 중국에 갔습니다.
당시의 세계를 전부 돌아다닌 것입니다. 또 한국과 일본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쿠데타가 있었고, 이 총결산이 663년의 백촌강(白村江)싸움입니다.
동아시아의 모든 세력이 참여한 싸움입니다. 동아시아세계가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때 한 차원 높은 문화를 만드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우메하라=도성(都城)을 만든 시기가 고구려는 2세기, 백제가 4세기인 데 비해 일본은 7세기로 상당히 늦습니다. 옛 아이누의 풍습에 사람이 죽으면 그 집을 불태워 바치는 풍습이 있었고 한국과 달리 일본은 바다 덕분에 외국으로부터의 압력이 적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일본에서는 사촌간 결혼, 어머니가 다른 형제 간의 결혼도 인정했는데 유교문화를 받아들인 한국에서는 짐승의 행위라 했죠. 그런 여러 배경을 인식하면서 '융'이란 입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메이지시대 이후 일본은 융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도 융합을 인정하지 않는,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한 동조론(同祖論)으로, 일본문화를 강조하는 잘못된 정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읽기와 공동연구
▦이어령=지금과 같은 국민국가라는 근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지 않고 옛날을 본다면 상당히 자유롭게 와서 나라를 세우고 어떤 세력을 만들고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늘 일본이나 한국을 이런 시각을 포함해 다양한 시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국민국가라는 근세 이후의, 메이지유신 이후의 지배당하고 지배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아주 초연하게 오픈 마인드(OPEN MIND)의 시각으로 보는 새로운 역사읽기가 시작됐습니다.
일본사람들이 못 읽는 것도 한국측에서 보면 쉽게 풀리고, 한국사람들에게 어려운 것도 일본역사를 보면 쉽게 풀릴 수 있습니다. 정보를 교환하며 허심탄회하게 상대방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바로 나를 읽는다는 뜻입니다.
고대사 읽기에서 미래 읽기의 한 패러다임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에다=공통성과 이질성을 명백히 함으로써 상호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공통성으로만 얘기하면 별로 안 좋은 동조론이 돼 버립니다. 일한 동조론은 일한병합을 위한 나쁜 이론이 됐습니다. 차이점을 명백히 하고 상호 이해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발굴성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문헌에는 아무래도 해석이 들어가지만 물건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발굴성과를 공유하면서 공통성만 찾는 공동연구가 아니라 이질성을 찾는 공동연구를 중국을 포함해서 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하는 길입니다.
▦신경철=고고학에서도 상사성과 상이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유적이 나오면 일본인이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경우는 있지만, 아직 양국 조사단이 공동으로 발굴을 신청해 허가받은 일은 없었습니다.
돗토리(鳥取)현 무기반다이유적이 골프장 건설로 파괴위험에 처했을 때 한국 고고학자800명의 서명을 받아 돗토리현 의회에 제출한 바 있는데 양국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보존운동을 벌여 성공한 사례입니다.
▦이노쿠마=고대 아스카는 국제사회였습니다. 지금도 국제사회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문화를 자기 나라만이 아니라 공통의 연구테마로 삼아 공동연구를 해가면 좋은 것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여기에 한일 공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령=서로 제휴해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면 더 풍성한 결실이 있고 21세기의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와 경제, 문화와 산업이 이어지면 겉모습의 교류만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발신자로서의 문화'를 세계에 내보낼 수 있습니다. 구체적 프로그램도 많다고 확신합니다.
/정리=유승우 신윤석 유성식 송용창기자
■도래인에 대한 일본시각
기원전~백제멸망시기 4단계로 한반도인 이주
일본인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이주한 사람들을 4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제 1단계는 야요이(彌生)시대(BC 3~AD 3세기)로 일본열도에 도작(稻作)과 금속기를 전래한 사람들이며, 제2단계는 5세기를 전후하여 주로 아스카(飛鳥)를 중심으로 하는 야마토(大和)지역에 자리를 잡은 사람이다.
제3단계는 5세기 후반 이마키(今來)라고 불리는 곳에 정착한 사람들로 주로 도자기를 만들거나 비단을 짜는 기술자들이다. 제4단계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멸망(660년)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이들에 대한 일본의 시각은 한반도에 대한 시각에 따라 달라졌다. 과거 '4세기 중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약 200여년간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할 때는 한반도에서 온 이주자 대부분을 천황의 덕을 흠모해 넘어온 '귀화인'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뒤 임나일본부설이 부정되면서부터는 '귀화인'과 '도래인'을 나누어 생각하기 시작했다.
도래인은 정치적 색채를 배제한 순수한 이주자를 의미한다. 현재는 대부분 4단계때 이주한 한반도인을 도래인으로 이해하고 있다.
/ 김현구
*다음 좌담회는 2001년 5월 경주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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