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관객이 본 것은 아니지만 대만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는 잊혀지지 않는 소리를 남겼다.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들리는 것은 온통 소음 뿐이었고, 영화가 끝날 때쯤 여주인공 양귀매는 10여분을 울었다. 아무 말도 않고 엉엉 울기만 했다.차이밍량 감독, 이강생과 양귀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연 소음(騷音). 이런 정보만을 두고 본다면 '구멍' 역시 1994년작 '애정만세'와 다를 것이 없는 다소 지루한 영화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 역시 '진화'한다면, 그는 분명 몇 단계 도약했다.
대만에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허름한 아파트 어딘가에서는 물이 새기 시작한다. 두 주인공이 아래층의 천장이 위층의 바닥임을 알게 된 것은 수리를 위해 배관공이 구멍을 뚫으면서부터였다. 그 구멍을 통해 둘은 조금씩 교류한다. 술 취한 남자는 구멍에 구토를 하기도 하고, 때론 여자를 엿보기도 한다. 여자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조금씩 지쳐간다.
그러나 소음이 상징하는 엄격한 현실성은 영화의 막간극처럼 펼쳐지는 '극장식 쇼'를 연상케 하는 뮤지컬을 통해 팬터지로 공간이동 한다. 여자는 처음엔 남자를 유혹하는 노래를, 조금 있다가는 남자들이 귀찮아 죽겠다는 노래를 들려주고 춤을 추는데, 70년대 TV의 '쇼쇼쇼' 분위기이다.
우리 현실을 계속 인수분해하면 결국은 판타지라는 해답을 얻게 되는 것일까. 바퀴벌레처럼 빛을 싫어하고 구멍 속으로 파고들게 되는 '대만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 그리고 음습한 일상을 관통하는 화려한 춤과 율동, 벽화 '천지창조'를 패러디한 듯한 구멍을 통해 내미는 위층 남자의 손까지.
너무나 비참한 일상을 담아내는 데 통달한 감독은 서서히 절망의 끝에서 환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1998년 칸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30일 예술영화전용관인 서울 하이퍼텍 나다에서만 개봉한다.
이대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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