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의 일종인 누(gnu)는 케냐 등 아프리카 중동부 초원에서 번식기를 보낸다. 큰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누 떼는 건기가 닥쳐 오면 물이 풍부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데 큰 강이 이들의 이동로를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강가로 몰려든 누 떼들은 악어가 득실득실한 도도한 강물에 겁먹고 멈칫거리다가 용감한 놈이 먼저 뛰어드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동시에 악어떼들의 사냥도 시작된다.
악어들은 거대한 입을 벌여 한 입에 영양 뒷다리나 목을 물고늘어져 순식간에 먹어 치워버린다. 이 사이 악어의 이빨을 피한 대다수의 누들은 강물을 무사히 건넌다. 도강 과정에서 일부가 희생되지만 종족 자체가 유지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야생 세계의 흥미로운 생존 양태를 보여주는 누떼의 도강 모습은 TV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하는데 기자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우리의 국회의원들이 떠오른다.
정글과도 같은 선거판에서 승리해 살아 남았지만 여의도 의사당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불법선거 수사라는 강을 건너야 한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규정 상으로는 매우 엄격한 선거법을 엄밀히 적용할 경우 여기에 안 걸릴 당선자는 거의 없다.
거의 모든 당선자가 잠재적으로 '악어'의 먹이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당선자의 대다수는 '악어'를 피할 노우하우가 뛰어나거나 운좋게도 '악어'의 눈에 띄지 않아서 강을 무사히 건너고 여의도 의사당에 입성하게 된다.
재수없는 몇몇 당선자들(대개 선거운동 뒷처리에 미숙한 초선들이다)을 제물로 해서 선거판이 어느 수준 이상으로 타락하는 것을 막으면서 법과 정치현실이 타협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요즘 이 '악어'의 정치적 중립성 논란으로 여의도 정가가 시끄럽다. 한나라당이 검찰의 4ㆍ13총선 불법선거운동 수사의 편파성을 문제삼아 검찰총장과 대검차장에 대해 발의한 탄핵소추안이 17일 처리될 예정이다. 한나라당은 탄핵소추로 정치검찰에 철퇴를 내림으로써 검찰을 바로 세운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여야를 불문하고 불법선거운동에 중대한 책임이 있는 정치권이 불법선거를 수사한 검찰 지휘부를 단죄한다는 것은 어쩐히 이상하다. 기자가 현장 취재를 한 선거 중 가장 탈법이 적었던 선거는 문민정부시절인 95년의 6ㆍ27지방선거였고 가장 혼탁했던 선거는 96년 4월의 15대 총선이었다.
95년 지방선거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공명선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탓에 깨끗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그같은 선의가 선거참패로 나타나자 1년 뒤의 15대 총선에서는 태도를 180도 바꾼다.
특히 수도권에서 금권과 권력의 작용이 극심했다. 특정기업과 여당후보 묶어주기, 안기부 등 권력기관의 여당후보지원, 여론조사를 통한 표심파악 등 과학적(?) 선거지원으로 총선사상 처음으로 서울에서의 여당승리를 얻어냈던 것이다.
당시 여당 후보들 중에서는 선거막판에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돈이 몰리더라고 실토한 사람들이 있다. 그때 신한국당의 선대위원장은 이회창 현 한나라당 총재였다. 이번 16대총선에 투입된 금력과 권력이라는 여권 프리미엄은 총량 면에서 15대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권력장 안에서 편향성을 띠는 검찰의 정치성향도 고쳐져야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치권 스스로 선거과정에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각오와 함께 선거법과 제도를 정비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계성 정치부 차장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