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미국 네바다 사막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던 시인에게 사막은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메마른 대지에는 뿌리를 땅 속에 붙어 있게 할 만큼의 수분도 허락되지 않았다.땅을 잃어버린 풀들은 뿌리를 매단 채 새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씨를 분배하며 뿌리가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은 또 다시 생명의 힘을, 그 궁극의 힘을 생각케 했다.
3월이 되면 그 황량한 사막이 푸릇푸릇한 잎새로 덮힌다는 설명을 듣고 그는 미국 여행 길을 생각해 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이 위대한 장면에 탑승했다는 것이 기뻤다.
시인은 그런 사람이다. 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일, 절창 끝에 새로운 희망의 노래를 기억하는 일. 그런 작업이 시인의 몫이다.
'돌이 자라는 세월만큼/ 더디게 불어나는 소수의/ 진정한 독자/ 아아 그들의 혈관 속을/ 맵고 순열한 혈액으로/ 흐를 수만 있다면' ('시와 독자' 중)
그러나 시를 읽지 않는 시대다. 그렇다고 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호흡하고 그 만큼의 시를 써냈다. 그들은 왜 시를 쓰는가.
50여년 '시인'으로 불려온 김남조씨는 그러나 상처 받지 않는다. "내 시대 독자는 연로하고 새 시대는 젊은 독자와 호흡한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지만 외롭거나 초라해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을 흐르는 기본적인 진실, 시인이 그에 대해 경건하고 치열한 추구를 갖고 있다면, 당대 독자가 이탈되더라도 시인은 감성적 상처를 넘어 설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삶의 증언이나 고백으로 시의 준열성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의 증언과 고백으로서의 시는 시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그리고 가장 든든한 의탁이다.
1955년 조각가 김세중 서울대교수(1986년 별세)와 결혼하면서 터를 잡은 서울 용산구 효창동 자택에서 만난 김남조 시인은 요즘 800여 편의 시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바쁘다.
오자를 수정하고, 한자 말을 시대에 맞게 수정 작업도 한다. 시도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시대, 어차피 시가 인터넷을 통해 유포된다면 좀 더 적확한 시어의 유지를 위해 평생 작업을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시어를 다듬고 매만진다.
조각으로 치면 형태적 완결성을 갖춘, 군더더기 없는 구상 조각처럼 그는 시에 관한 한 어떤 오용도 용납하지 않는 듯 보인다.
시인은 얼마 전 일본에 다녀왔다. 떠들썩하게 자랑할 법한 상을 수상했으나 말을 아낀다. 그는 4일 38년간 발행되고 있는 장수 동인지 '지구(地球)'가 수여하는 제25회 지구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 소감으로서 시인으로 사는 것을 잠시 얘기했다.
그는 시인이란 많은 군중을 넘어 가장 바깥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자기를 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방문한 날, 일본의 한 시인이 그에게 시를 보내왔다. 시인으로 사는 일, 그리고 시인으로서 희망을 품는 일에 대한 감회를 적은 시로 시가 말라가는 것은 전세계적 현상임을 가늠케 했다.
'오늘의 현실은 이른바 만인 스스로가 시인의 어법을 앞질러 여러 심각한 가락들을 울려낸다' 14번째 시집 '희망학습'의 서문에서 작가는 이렇게 밝혔다.
'희망학습'은 IMF가 닥쳤을 때 내게 됐다. "슬픔에 굶주려 한국에 왔다"는 어느 외국 시인의 말처럼 한국은 정말 비극이 많은 나라였다. 또 나라가 엉망이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 위기'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자 또 다른 결과가 될 가족분리, 도덕의 상실, 희망의 상실이 아팠던 것이다.
생에 놓인 여러 '지뢰'들이 무시로 폭발하는 상황, 결코 쉽지 않게 시를 써왔던 시인은 더욱 절망했었다. 그러나 시인은 느끼되 굴복하지 않는다. '겨울햇빛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의 감수성이/ 야릇하게 조금 기쁘다' ('지뢰밭' 중)
'겨울 바다에 가보았지/ 미지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겨울 바다' 중) 이와 같은 시어로 '시인 김남조'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지뢰밭'의 정서는 좀 의아할 법하다.
여전히 시와 긴장 관계를 조율하는 시인이라면, 세상의 흐름에 나앉아 있을 수는 없다. 끊어질 듯한 슬픔에서 생의 맥박을 찾아내온 여태까지의 시가 그러했듯, 작가는 이제 또 다시 시와의 관계를 정립한다.
'난 연필심이야/ 부러져도 그냥은 아니고/ 동강동강 절망의 몰골/ 기막힐거야, 나는' ('연필심'의 마지막 연)
그는 요즘 좀 새로운 시를 쓰고 있다. 작은 날벌레를 보고 쓴 '작은 예쁜 이'란 시도 있다.
그는 사물시를 선호하지 않는다. 시인이 그저 시를 던져 놓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더욱 작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현미경처럼 더욱 예리해지는 감각은 오히려 새로운 것, 익숙하지 않은 것, 선호하지 않는 것을 시도할 만큼의 자양이 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가끔 효창공원을 산책하는 그는 나무를 본다. 무성한 잎새와 과실을 달고도 끄떡 없었던 나무들이 그것을 거두고 나면 허룩한 잎새 마저 무거운 듯 떨구어 내는 나무를 본다.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다. 생명력이 갖는, 살아있는 것이 갖는 아름다움 슬픔, 슬프기에 아름다운 그 배후를 본다.
김남조 약력
▦1927년 경북 대구 출생
▦1944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시 규슈(九州)여고 졸업
▦1947년 서울대 문예과 수료 ▦1951년 서울대 사범대 국문과 졸업 후 마산 성지여고,마산고 교사
▦시집 '목숨' 발표
▦1955년 시집 '나아드의 향유' 발표, 숙명여대 교수(1993년 정년퇴임)
▦시집 '겨울바다'(1967년) '사랑 草書' (1971년) '동행'(1980년) '희망학습'(1998년) 등 14권 발표
▦수필집 '잠시 그리고 영원히' ;달과 해 사이' '그래도 못다한 말' 등 콩트집 '아름다운 사람들'
▦예술원 회원. 한국시인협회 회장 및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역임
▦제7회 시인협회상 (1974년) 서울시 문화상(1985년) 국민훈장 모란장(1993년) 예술원상(1996년)
시
▲좋은 것
좋은 건 사라지지 않는다
비통한 이별이나
빼앗긴 보배스러움
사별한 참사람도 그 존재한 사실 소멸할 수 없다
반은 으스름
반은 햇살 고른
이상한 조도(照度) 안에
옛가족 옛친구
모두 함께 모였느니
죽은 이와 산 이를
따로이 가르지도 않고
하느님 책 속
하느님 필적으로 쓰인
가지런히 정겨운 명단 그대로
따스한 잠자리,
고즈넉한 탁상등,
읽다가 접어둔 책과
옛 시절의 달밤,
막 고백하려는 사랑의 말까지
좋은 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세상에 솟아난
모든 진심인 건
혼령이 깃들기에 그러하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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