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항공이 타이베이공항에서 이륙사고로 폭발하고 오스트리아 산악열차가 터널안에서 불타는 참사가 빚어졌다. '안전'에 관한 한 손꼽히는 모범 선진국들이 겪고 있는 안전사고다.두 후보가 박빙의 접전을 펼친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지금 개표를 완결하지 못한 채 최악의 헌정위기 국면을 연출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전도사인 양 행세해온 나라에서 돌출한 '민주주의의 반역'이다.
문제는 이 사태가 단순한 정치적 안전사고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선거제도의 허점에서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 미국식 대통령제의 문제까지 제기된다.
미국민의 47%가 CNN의 여론조사에서 "나라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상황인식이 근원적인 데에 닿아 있다.
나라가 걱정되기로는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형편만한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입달린 사람마다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
백화점이 무너지고 다리가 내려앉고 여객기가 떨어지던 '안전사고 왕국'의 미래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일찍이 국민의 쟁취했으면서도 마침내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는 '국민의 정부'의 행방에 관한 심각한 질문이다.
이 질문이 심각한 까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하는 이 정부의 구호에 대해서까지 민심이 근원적인 회의를 품게 된다는 점에 있다. 경제도, 정치도 무너져 내린 현실은 떠나는 민심을 황폐하게 만든다. 참으로 참을 수 없게 하는 고통이 있다.대의 또는 도덕성의 실종이다.
입에 올리기도 싫지만 청와대의 청소직원이 벌인 수뢰행각은 안전사고이거나 해프닝이 아니다. 금융관련 사건만나면 정치인 이름이 나오거나 공직자가 연루되는 사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그때마다 죽을 쑤는 검찰수사도 신물나는 풍경이다.
민심이 얼마나 상처받고 신음하는지, 그것이 흉흉한 바람이 되어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 똑바로 보아야 한다.
항간에 떠도는 의혹과 소문을 국회에서 실명으로 물은 데 대해 그것을 잘한일이라고 할 수 없겠으나 그렇다고 그 국회의원을 제명하겠다고 나서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
한쪽이 여전한 구태라면 다른 한쪽은 한 술 더 뜨는 구태다. 한발짝도 더 나아간 데가 없다. 민심이 절망하고 이반하는 것은 당연하다.
3년 전,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던 때에 이어 다시 실업의 공포가 엄습하는 겨울이 오고 있다. "돈은 돈대로 쏟아붓고, 기업은 기업대로 쓰러지고, 실업자는 실업자대로 늘어나고, 앞날은 앞날대로 불안하다"는 탄식이 과장만은 아니다.
정부 여당은 위기대응 처방으로 '고강도 사정'을 제시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결전'이라는 표현으로 부패척결의 의지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대응과 표현에 익숙한 국민들로서는 별다른 '감동'이 없다.
아예 믿지를 못하거나, 그 결과가 뻔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선 개표추이를 '박진감 넘치는 민주주의의 드라마'로 보려는 희망적인 관측자들은 '지고도 이기는 멋진 승복'의 결말을 기대하라고 말한다.
그야말로 '감동의 정치'의 모습이다.
김 대통령의 '마지막 결전'이 국민을 감동하게 하고, 국민을 다시 고통분담의 대열로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엇'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뻔한 일, 늘 보아온 일로 국민의 무디어진 감각을 자극하고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참으로 민심 앞에 겸허해야 하는 것이 지도자의 큰 덕목이다. 왜 국민통합에 실패하는지, 안타깝고 서운하더라도 뼈속깊은 통찰로 자기 희생의 각오를 내보여야 한다. 지금은 '감동'이 필요한 위기의 때이기에 그러하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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