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이 된 후 매일 실수를 해댔다. 지난 금요일에는 수십명 앞에서 꽈당 넘어졌다. 어느 곳에서 토론회 후 교단을 내려오던 길이다. 창피함과 아픔 속에서도 화살처럼 걱정이 스쳐갔다. "15일 수능시험일에 못 일어나게 되면 우리 아이 어쩌지?"고3짜리 아이를 둔 다른 엄마들도 나처럼 11월 들어 실수 연발에 정신이 없다고 한다.
핸드폰인 줄 알고 가방 속에 엉뚱한 물건을 집어 넣고 나온 이, 층계를 자꾸 헛디디더니 넘어졌다는 이, 걸핏하면 커피를 엎지른다는 이, 책 읽기는 물론이고 설거지조차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이... 족히 30년은 된 우리 사회의 고3 엄마 병 증상이다.
올해 수능시험을 치를 아이들 수는 약 86만 명. 고3 엄마 병을 앓고 있는 엄마들도 같은 수라는 계산이 된다. 물론 아이들이 시험 때문에 겪는 스트레스와 여러 증상, 이를테면 정신적인 일종의 공황, 갑자기 무엇에 인가 대들고 부수고 싶은 공격성, 수면과 섭식 장애에 비하면 엄마들 병은 가벼운 것일지 모른다.
고3짜리를 둔 엄마들은 요즘에야 말로 '남의 몹쓸 염병 보다 코 앞의 내 고뿔이 더 걱정'인 것을 실감한다. 나라 안의 경제 위기설, 나라 밖의 정세, 한 편의 드라마인 듯 뒤집히고 뒤집혀 아직도 당선자가 결정 나지 않은 미 대통령 선거 같은 '남의 큰 일'보다는 '눈 앞의 내 고뿔'인 고3 아이의 건강과 기분이 더 걱정이다.
수능시험 관련기사라면 하나라도 놓칠까 염려하여 챙겨 읽었던 나는 작가 이문구의 소설을 읽고 난 후 비로소 나의 고3 엄마 병이 깊은 것을 실감했다.
충청도 사람들의 삶을 그린 그의 단편 '장평리 찔레나무'를 읽고 나니, 소설 전체가 머리 속에 남는 것이 아니라 고3짜리와 관련된 서술만 남는다.
특히 또렷한 것은 우리 사회가 고3짜리 가정에는 각별히 신경을 써주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아마 작가도 수능시험 본 아이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은 경험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작가는 입심 좋게 시골 부녀회장인 주인공의 입을 통해 말한다.
"고3짜리가 있는 집은 내남적 없이 서루가 안부 전화두 망설이기 마련인디 ." "관심도 없었던 (딸 아이) 월미의 수능시험 점수를 물고 늘어져 (왜) 오장이 뒤집히게 하능가 ."
맞다. 고3짜리가 있는 집은 올 한 해, 특히 수능시험을 하루 앞둔 오늘 안부전화도 신경 쓰인다. 여러 방식으로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지만 보통 아이들은 수능시험의 성적이 대학 입학의 관건인데 "아이가 시험 봐요?" 묻는 것도, 느닷없이 전화 걸어 "시험 잘 보라고 하세요"도 부담스럽다.
'수능 적중률 100%에 도전한다'는 허황된 문구를 내걸고 모의고사를 실시하거나 '합격 기원, 힘을 주는 선물'이라는 말 아래 결국은 열쇠고리, 엿 바구니, 노래 테이프를 판매하는 인터넷 사이트들은 정말 시시하게 보이는 오늘이다.
아이들의 교육에서 시험은 피할 수 없는 제도이다. 스트레스를 주게 되더라도 아이들에게 시험을 보이지 않을 수는 없다.
영국 같은 곳에서도 초중고의 시험을 줄이자, 늘이자로 시끄럽지만(bbc.co.uk/English/education) (qca.org.uk) 국가경쟁력 향상을 위해서는 시험을 줄이는 것이 옳지 않다고 믿는 나는 내일 시험장에 나서는 아이에게 그저 "다녀 와" 할 것이다. "시험 잘 봐", "너를 믿는다"도 짐이 될까 봐서.
편집위원 par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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