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정말 죄송합니다."미 대선의 개표가 막 시작된 지난 7일 저녁 조지 W 부시 후보 가족의 저녁식사장소인 텍사스주 오스틴의 포시즌호텔 쇼어라인 그릴. 부시의 동생 젭(플로리다주지사)은 TV에서 '플로리다, 앨 고어가 차지'라는 MSNBC의 보도가 흘러나오자 형에게 다가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뉴스위크 최신호(20일자)는 대선 개표가 시작되던 이날 밤 각 후보진영이 겪은 흥미진진한 일화를 자세히 보도했다.
젭의 위로에 이어 조지 W 부시의 쌍둥이 딸들이 아빠의 품에 안겨 흐느끼자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괜찮다, 이건 길고 긴 밤이 될 것이다"고 위로했다. 당황한 조지 W부시는 "주지사 관저로 돌아 가자"며 가족을 이끌고 식당을 나섰다.
사색이 된 젭은 호텔에 혼자 남아 몇블록 떨어진 선대본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선거전략가인 칼 로브를 찾았다. 역시 믿었던 플로리다가 나가 떨어졌다는 방송보도를 보고 그간의 각종 데이터를 재분석중이던 로브는 "이 보도는 성급한 엉터리 예측이다"고 답했다.
로보는 즉시 방송사들에 전화해 "이같은 잘못된 오보는 아직도 투표가 진행중인 서부쪽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정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같은 시각, 테네시주 내슈빌의 로위스 밴더빌트호텔 7층에 위치한 앨 고어 선대본부 사무실. 개표초반의 리드소식에 들떠있던 고어의 선거참모들은 부시측 로브의 이러한 움직임을 불안감 속에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상대팀의 참모이지만 이들은 선거판세 분석에 관한 한 로브의 능력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앞서 고어가 미시건과 펜실베니아에 이어 필승전략 요충지로 지목하고 있던 플로리다에서 우세를 보이자 고어의 두 딸은 부둥켜안고 기뻐했고 부인 티퍼는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흥분된 분위기는 방송들이 정각 8시에 '플로리다가 다시 혼전 중'이라고 정정하는 바람에 2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고어 참모들은 부시가 리드하는 예닐곱 주에서 녹색당의 랄프 네이더가 의외로 선전하자 처음으로 초조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네이더가 TV에 얼굴을 비치자 이들은 볼륨을 줄여버렸다.
역시 이날밤 선거예측에 있어서는 '도사'나 다름없는 빌 클린턴 대통령은 뉴욕주 채퍼쿠아 사저에서 부인 힐러리의 당선을 일찌감치 확신하고 마치 농구경기를 지켜보듯 느긋하게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측근들에 따르면 클린턴은 이날 개표시작 전 역전의 용사답게 거의 모든 주의 판세를 미리 예측했다. 다만 위스콘신을 부시가 차지하고 플로리다를 고어가 이길 것이라는 점은 예측이 빗나갔다.
다음날 새벽 2시16분, 지루한 시소전끝에 CNN을 시발로 폭스TV 등 모든 방송들이 '부시당선'을 보도하자 부시 참모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부시의 하버드대학 룸메이트출신으로 선대본부장인 돈 에반스는 "내 인생에 가장 피말리는 경험이었다"며 "우리는 한때 지는 줄 알았다"고 논평했다.
내슈빌에서 플로리다에서의 열세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며 당선소감 원고를 작성중이던 고어는 "ABC가 부시승리를 보도했다"는 참모의 외침을 들었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띄었던 고어는 참모들에게 "그간 먼길을 함께 오느라 고생했다"며 위로하고 패배시인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고어는 곧바로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했다.
그러나 잠시후 조지프 리버만 부통령 후보가 "AP통신 보도로는 격차가 급격히 줄고있다 하니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말했다. 플로리다의 격차가 1% 이내로 좁혀들자 고어 참모들은 '격차가 0.5%이내일 경우 재검표'라는 플로리다주 선거법조항을 들어 재검표 가능성이 있다며 고어에게 패배 시인전화를 취소토록 촉구했다.
고어는 다시 부시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이 변해서 당선전화를 취소한다"고 전했다. 바로 이 시간 부시당선을 전파했던 TV들도 일제히 '대선 다시 혼전'이라고 정정하기 시작했다.
정치감각이 탁월한 클린턴은 대혼란이 벌어진 10일 고어에게 전화를 걸어 "참고 견뎌라"고 '버티기'를 조언했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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