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의 아름다움을 그 극점(極點)까지 드러낸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 미당 서정주(85)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미당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국화 옆에서'일 것이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해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다 보다"로 마무리되는 이 시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어서, 한국인 대부분에게 익숙하다. 이 시가 발표된 것은 1947년 11월 9일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서다.
지난 10월 10일 아내 방옥숙 씨와 사별한 미당은 큰아들 승해(변호사) 씨가 살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표까지 끊어둔 상태였는데, 기력이 급격히 쇠해 출국을 미루고 가료(加療) 중이다.
일제 말기의 친일, 독재자에 대한 송사(頌辭) 등 역사의 굴곡 속에서 미당의 삶에 새겨진 흠집들은 예술적 위대함과 정치적 올바름 사이의 간극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에 가톨릭대 국사학과 박광용 교수는 미당이 '국화 옆에서'의 '국화'로 은유한 것이 이승만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미당은 그 당시 윤보선의 주선으로 이승만의 집에 드나들면서 그의 전기를 쓰고 있었다.
박 교수의 해석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당의 의도와 상관없이 '국화 옆에서'를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국화 옆에서'가 좋은 시라면(기자는 개인적으로 그 시가 미당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여러 겹의 의미를 품고 있어서 해석의 지평이 한없이 넓을 터이므로.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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